‘친밀한 관계’에 놓인 이들로부터 경제적 착취나 폭력을 당한 장애여성이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장애여성을 ‘낮은 위치’에 두고, 보호를 명목으로 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인식·구조가 이들이 놓인 차별과 피해를 가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애여성공감이 밝힌 지난해 장애여성 인권상담 현황에 따르면 폭력 관련이 32%(52건), 독립생활 상담 19%(32건), 차별 및 인권침해 상담이 14%(23건) 순으로 집계됐다. 가해자·행위자와 피해자는 직계가족 및 연인, 동거인 등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상담 지원의 방법 별로는 일상(44%), 정서(20%)적 지원에 이어 법률지원이 13% 이뤄졌다. 동거친족과 동거인의 방임 및 경제적 착취에 따른 장애인복지법 위반이나 사기 건으로 법률지원을 호소한 경우, 의사소통 조력이나 의견서 작성 등 지원이 이뤄졌다.

올해는 차별 및 인권침해 상담 비중이 높았는데, 수급비착취·사회서비스 부정수급·휴대전화 및 대출 사기 등 경제적 착취와 노동차별(최저임금 미준수 및 직장내 역량강화 배제 등) 양상을 보였다. 유진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31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된 ‘친밀성과 통제: 장애여성 피해 경험 재해석’ 토론회에서 “원가족 내에서의 일상적 차별·통제가 장애여성이 가족 내 차별·폭력에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며, 폭력 개념을 협소하게 해석할 경우 당사자에게 일어나는 차별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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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발표한 ‘2018년 전국 장애인학대 현황’에 따르면 학대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는 집이나 시설 등 ‘거주지’(35%)로 나타났다. 학대사례 행위자 가운데 33%는 소위 ‘친밀한 관계’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1위는 23.1%로 거주시설종사자, 2위는 12,9%로 부모였으며 배우자·동거인·친인척도 가해행위자에 포함됐다.

유진아 활동가는 “원가족 내에서의 폭력·차별을 경험한 혹은 빈곤한 자원·관계를 이유로 탈가정한 장애여성들은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가장 유효한 가치를 지닌 몸을 활용한다”며 “이를 통해 때로 ‘여성’으로의 인정, 감정의 충족, 의식주 혹은 안전함 등 시급한 과제가 해결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도구화하는 남성들에게 가사노동·여성으로서의 몸이 이용당하는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명의도용을 위한 부채형성, 수급비수탈 등 경제적인 착취 등의 대가를 지불토록 한다. 그러나 애정이라는 친밀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관계는 장애여성의 ‘자발적 선택’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애인의 반복적 소액 대출 때문에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장애여성이 “(그가 힘들다고 하니) 갚지 말라고 했다”면 온전한 동의일까. 유 활동가는 실제 상담사례를 들어 “관계 단절의 두려움과 고립감, 조금만 더 있으면 갚겠다는 회유와 설득, 원가족 불신,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던 친절함을 떠올리는 복잡한 감정과 상황 속에서 발화되는 문장”이 “맥락과 의도는 사라진 채 ‘당신이 선택했으며 자발적 동의 아래 대출과 빚 탕감에 응했다’고 해석된다”고 전했다. ‘배가 고픈데 밥 먹을 돈이 없다’, ‘사고가 났는데 너무 아프다’ 등 상대방이 ‘친밀함’을 토대로 착취를 가해도, 증명하고 설명하는 책임은 장애여성 몫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 31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장애여성공감 주최 ‘친밀성과통제: 장애여성 피해 경험 재해석’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31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장애여성공감 주최 ‘친밀성과통제: 장애여성 피해 경험 재해석’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이 ‘친밀함’은 폭력·착취 사건에서 피해를 사소화하거나 피고인에게 가벼운 처벌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최현정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법 변호사는 현재 대법원 성범죄 양형기준의 가중요소인 ‘인적 신뢰관계 이용’이 사제지간이나 지인 자녀 등에 준하는 피해자와 상호 신뢰를 의미할 뿐 연인관계 등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배우자 간에 형을 면제하도록 규정한 형법 제328조 제1항(친족간의 범행과 고소)은 대부분의 재산범죄(사기·횡령 등)에 준용된다 재산범죄는 공갈(미수)과 특수공갈(미수)을 제외하고는 가정폭력 범죄로 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 변호사는 “장애여성이 ‘성, 가사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인식은 법적인 접근에서도 중요하다. 장애여성으로부터 얻은 여러 노동과 경제적 이득(많은 경우 수급비)을 지워버리면, 장애여성은 의존적이고 돌봄이 필요한 무기력한 존재로만 상정된다. 이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착취는 인권 침해가 아니라 지속적인 돌봄 노동에 지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고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이는 수사기관이나 법원 판단에도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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