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모친 고 강한옥 여사에게서 잊을 수 없는 기억 두가지를 언급해놓은 기록이 있다. 중학교 시절 암표상을 해보려 부산역에 갔다가 돌아온 기억, 대학시절 구속됐을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호송차 뒤로 달려오던 기억이다.

문 대통령이 대선후보가 되겠다고 마음먹을 무렵인 지난 2011년 쓴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을 보면, 문 대통령이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를 기억하는 대목들이 꽤 나온다.

문 대통령의 부모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다. 그는 그 집안을 두고 “우리 집안은 여러대에 걸쳐 흥남에서 살았다”며 “문씨 집성촌이 있을 만큼 많이 모여 오순도순 모여 살던 부모님과 친척들의 행복은 전쟁으로 끝이 났다”고 표현했다. 한국전쟁시 문 대통령의 어머니, 아버지는 2~3주 정도 예상하고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남쪽 생활 정착은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라고 표현했다.

그나마 문 대통령의 아버지 집안은 가까운 친척들이 함께 피난을 내려왔지만 어머니네 쪽에서는 아무도 내려오지 못해 어머니는 이남에서 혈혈단신이었다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어머니가 ‘피난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세상천지에 기댈 데가 없어서 도망가지 못했노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다고 썼다.

그의 어린시절 부모는 가난했고, 경제적 능력도 그다지 없었다고 기술했다. 문 대통령은 “아버지도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었지만 어머니도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며 “그저 호구지책을 근근이 유지하는 수준이었다”고 썼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처음 한 일은 구호물자 옷가지를 시장 좌판에 놓고 파는 것이었고, 작은 구멍가게와 연탄배달 등이었다. 연탄배달 할 땐 아버지에게 거들게 하는 대신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과 남동생에게 말해 학교 마치고 돌아온 후나 휴일이면 연탄 리어카를 끌거나 연탄을 손에 들고 배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나는 검댕을 묻히는 연탄배달 일이 늘 창피했다”며 “나는 툴툴거려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모친 고 강한옥 여사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모친 고 강한옥 여사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사진=청와대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암표상을 해보고자 부산역을 갔던 사실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복지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어릴 때의 기억이 하나 있다”며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여름, 일요일 새벽에 어머니가 자신을 깨워 부산역에 가자고 해서 갔다고 기술했다. 거리만 해도 6~8km 정도는 되는 먼 거리였는데, 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일요일 서울 가는 특급열차 차표가 귀하니 그 차표를 사뒀다가 표를 못 산 승객에게 웃돈을 얹어 팔면 벌이가 좀 된다는 말을 아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말하자면 기차표 암표장사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정작 “부산역에 도착해 막상 표를 팔기 시작했는데도 어머니는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표를 사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며 “그때 어머니가 왜 그냥 돌아왔는지 모른다”고 썼다. 그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며 “어머니도 그 후 다시는 암표장사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 일이 식구들도 모르고 어머니와 자신만 아는 일이라면서 그동안 입에서 꺼본 적이 없다가 당시 책을 쓰면서 여쭤봤다고 한다. ‘그 때 왜 그냥 오셨냐’고. 그랬더니 어머니는 “듣던 거 하고 다르데”라고 답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며 “그런 일이라는 게 벌이가 좀 된다고 소문나면 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거나 단속을 받게 되면서, 처음 얘기 들었을 상황과는 같지 않은 법이거나, 아니면 어린 아들과 함께 하기에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석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때 우리 모자 생각이 난다”고 떠올렸다.

그는 대학생이 된 이후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하다 구속됐을 때 어머니를 본 기억도 기록했다. 1975년 4월 경희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유신반대 시위를 했을 때의 일이다. 문 대통령은 비상학생총회 당일 총학생회장(강삼재 전 신한국당 의원)이 학교에 오다 경찰에 붙잡혀 할 수 없이 자신이 총회를 개최했고, 구속될 각오를 한 뒤 자기 발로 걸어가 체포됐다고 썼다. 그는 청량리 유치장에 구속·수감되는 동시에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문 대통령은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는 동안 호송차에 올라탔을 때 철판에 뚫린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을 때 어머니를 봤다고 적었다. 그는 “어머니가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고 썼다. 그는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며 “혼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라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이후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 후에도 어머니가 호송차 뒤를 따라 달려오던 장면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며 가끔씩 면회오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미안하고 괴로웠다고 썼다. 그는 어머니가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필 네가 왜 그 일을 해야 했느냐”라고 묻는 것 같았으며 할 말이 없었다고 기술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썼다.

한편,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하면서 어머니의 이산가족 상봉을 한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기록했다. 그는 “2004년 7월 어머니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뽑혀 금강산에서 북한의 여동생을 만났다”며 “6남매의 장녀였던 어머니에게 마지막 남은 혈육인 막내 여동생이었다”고 썼다. 이산가족 상봉 성사 경위를 두고 그는 “어머니가 노태우 정부 때부터 신청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북쪽 여동생의 신청으로 뽑혔다”며 “선정된 건 내가 청와대를 떠나있을 때였는데 행사는 시민사회수석이 된 후 열렸다”며 “금강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 이모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고 강한욱(왼쪽) 여사와 북한에 있는 여동생이 지난 2004년 7월11일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고 강한욱(왼쪽) 여사와 북한에 있는 여동생이 지난 2004년 7월11일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