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 일이다. 강의 없는 토요일 오전 단잠에 취해 있는데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이모는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너희 집에 아무 일 없니?”라고 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하니 이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침 신문을 한번 보라고 했다. 

사회면 귀퉁이에 실린 가십난엔 20대 남자가 연립주택 4층 꼭대기에 있는 자기 집에 들어가려다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술 취해 열쇠를 잃어버린 그는 옥상에 올라가 케이블 선을 잡고 발코니 창문으로 집안에 들어서다가 밖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옆집 1층 슬래브 지붕으로 추락해 목숨을 겨우 건졌다. 

기사에 실린 주소는 우리 집이었다. 기사에 나온 사람은 나와 성만 다르고 이름이 같았고 나이는 나보다 2살쯤 위라고 적혀 있었다. 옆집 남자였다. 기자가 408호와 409호를 헷갈려 적었다. 신문을 본 이모는 내가 사고를 당한 줄 알았다. 

피식 웃고 말았지만 그때 처음 신문사 사건기사에 사람들 주소가 실리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 

1년 뒤 신문사에 들어가 처음 경찰서에 배치받았을 때 시경 캡은 맨먼저 순경부터 치안총감까지 경찰 계급과 9급부터 1급까지 공무원 서열을 외우라고 했다. 다음날 세 문장짜리 단신 사건기사를 쓰는데 원고지 10장은 족히 내다 버렸다. 선배들이 말한 스타일북을 숙지하지 못한 탓이었다. 

당시 사건기사엔 피의자나 피해자를 쓸 땐 반드시 이름 뒤에 괄호 열고 만 나이와 주소, 직업까지 써야 했다. 이름은 되도록 한자로 쓰라고도 했다. 

한 1년쯤 지나 중앙일보가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점차 신문에서 한자는 줄었지만 사건 당사자 주소를 명기하라는 지시는 계속됐다. 나는 어느 날 캡에게 물었다. “강도 피해자에게 위로편지 쓸 일 있습니까? 왜 지번까지 넣어 주소를 챙겨야 합니까?” 

캡은 옛날에 하도 위에서 기사 많이 쓰라고 조르니 없는 사건을 만들어서 페이크 기사를 쓰는 일이 많아서 그렇다고 답했다. 또 다른 선배는 정확하게 취재했다는 걸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그런다고 했다. 

독재권력이 오래 집권했던 한국에서 정권이 국민들 눈속임 하려고 내미는 가짜뉴스에 속아 온 언론이 이런 사소한 것에서 정확성을 발휘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기자들은 누가 더 주소나 나이, 한자 이름까지 정확하게 챙겼는지 경쟁하기도 했다. 불과 20여 년 전 얘기다.

▲ 취재기자. 사진=ⓒ gettyimagesbank
▲ 취재기자. 사진=ⓒ gettyimagesbank

 

이처럼 실명보도와 익명보도의 기준은 한국에선 거꾸로 실현되고 있었다. 언론학 교과서는 힘 있는 권력자는 실명 보도하고 공인이 아닌 시민은 익명 보도하는 게 원칙이라고 가르치지만 우리 언론은 90년대까지 동네 주민의 실명과 주소까지 꾹꾹 눌러 썼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반인권적 보도였다. 90년대 중반에 와서야 이런 관행은 점차 사라졌다. 87년 거리의 시민들이 만든 민주화가 언론사에 체화되는 데 10년 남짓 걸린 셈이다. 90년대 후반엔 초상권 침해라는 말도 등장했다. 

1890년대 독립신문은 동학 농민을 ‘폭도’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보수진영조차 동학혁명군이라고 바로 잡아 부른다. 80년 광주에서도 언론은 시민들을 ‘폭도’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시민군이라고 부른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언론은 사실 늘 시대를 뒤따라가기 급급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시대 흐름을 제대로 따라 가기라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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