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에서 공해 사태가 나면 피해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피해를 입증해야 했다. 지금은 자신의 질환이 특정 성분으로 발생했고 그 성분이 공장에서 나온다는 사실만 제시하면 사측이 반증 책임을 진다. 과로사와 과로자살도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타데 시게루(北出 茂) 과로사방지오사카센터 사무국장은 “과로사방지법이 시행됐지만 노동자는 죽기 전 도망가지도, 싸우지도 못한다. 반면 블랙기업은 지속적으로 생존한다. 실제 과로사 인정 기준과 입증 책임을 바꿀 차례”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타데 국장은 일본에서 과로사방지법 제정운동을 처음 제안한 6인 중 하나다. 그는 ‘아시아 직업 및 환경피해자 권리네트워크’가 28~30일에 걸쳐 개최하는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과로 문제가 심각한 한국에 과로사방지 운동의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서다. 28일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인근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기타데 국장이 과로사 운동에 몸담게 된 건 그도 ‘파워하라’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파워하라(power harrassment의 준말)’는 직장 내 괴롭힘의 일본어 표현이다. 한 유통대기업 회사원이던 2011년, 경영진이 불법행위를 시켰다. 웹사이트에서 내부 계정을 이용해 경매 입찰가를 올리는 사업계획서에 결재하란 지시였다. 그는 거부한 뒤 내부고발 의사를 밝혔다. 잘나가던 법무부 과장은 하루 아침 퇴직강요와 위협 표적이 됐다. 이에 그는 전국노동조합총연합회(젠로렌) 지역노조에 가입해 처음으로 사측 반대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 뒤 퇴사해 젠로렌 오사카청년유니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데 시게루 과로사방지 오사카센터 사무국장. 사진=김예리 기자
▲기타데 시게루 과로사방지 오사카센터 사무국장. 사진=김예리 기자

기타데 국장은 개별 과로사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노동상담을 하며 블랙기업(청년노동자에게 비합리적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을 언론을 통해 폭로했지만, 기업을 하나 하나 때린다고 해서 일본사회가 바뀌지 않았다. 특히 장시간 노동 관련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회사들은 책임을 면했다. ‘일을 못하면 쓸모 없는 인간’이란 사회인식도 팽배했다. 이는 과로로 인한 질병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에 테라니시 과로사 유족 모임(전국과로사생각가족모임) 대표, 이와키 유타가 변호사 등 전문가와 활동가, 당사자가 모여 법 제정운동에 나섰다.  52만 명 서명과 참의원 팩스보내기 등 캠페인을 진행한 끝에 2014년 관련법이 제정됐다. 그는 “1945년 이래 노동법이 악화일로를 걷는 동안 시민사회가 아래로부터 요구해 법을 제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과로사방지법은 ‘과로사’ 개념을 법률에 못박았다는 선언 의미가 크다. 기타데 국장은 “당초 우리가 작성한 법률안은 블랙기업 형사처벌 조항을 포함했다. 그러나 기업 정치헌금을 받는 의원,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장시간노동이 불가피하단 인식이 더해져, 벌칙조항이 빠진 채 통과됐다”면서도 “중앙·지방정부의 과로사 방지 의무를 명시한 게 성과”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과로사 방지를 위한 당사자·전문가·활동가들의 심포지엄과 당사자 모임 등 활동에 예산을 책정한다.

한국은 정부여당 주도로 주 52시간제 보완이 필요하다며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입법을 추진 중이다. 11시간 의무휴식조항은 노사합의로 피해가도록 했다.

기타데 국장은 일본도 최근 장시간 노동 규제를 시행했지만 마찬가지로 허점이 많다고 했다. 과로 인정 문턱 자체가 높다. 지난해 통과된 ‘일하는 방식 개혁법’은 최초로 잔업(초과근로)시간에 상한을 뒀지만, 한 달에 100시간까지 허용했다. 하루로 치면 5시간이라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또 일본인은 법정 연차유급휴가를 잘 쓰지 않는데, 이를 개선한다며 1년에 5일 쓰도록 강제하는 데 그쳤다”고 했다.

이 탓에 과로사와 과로자살의 산업재해 인정 절차도 험난하다. 일본에서 과로사로 인정 받으려면 뇌나 심혈관 질환의 경우 월 잔업 80시간, 정신장애는 월 잔업 160시간을 충족해야 한다. 기타데 국장은 “두 기준 자체가 높을 뿐더러 피해자 측이 입증 책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다”며 “일본에선 과로사방지법으로 인식이 높아진 지금, 과로사를 실제 막기 위해 인정기준을 낮추는 일이 쟁점”이라고 했다. 

기타데 국장은 다시 언론 역할을 강조했다. 2015년 광고대기업인 덴쓰에서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츠리씨(24)가 월 100시간이 넘는 초과근무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언론과 협업해 폭로하며 사회 파장이 일었다. 공영방송 NHK 기자도 과로사한 사실이 2017년 뒤늦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는 “언론은 과로사를 낳는 제도를 지적하고, 개별 사건을 변화의 계기로 만드는 데 힘을 실어야 한다”며 “과로사는 진영과 당파를 초월하는 문제고, 그것이 한일 당사자 운동의 애초 취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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