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10월 유신’ 선포는 1972년 10월17일이었지만, 그 징조는 1년 전부터 예견됐다.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힘겹게 이기고 3선에 성공했지만 불안했다. 

1971년 10월28일 유엔은 총회를 열어 중국의 유엔에 가입을 승인하고 대만을 퇴출시켰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던 ‘핑퐁 외교’의 결실이었다. 

반면 군사정권이 집권한 한반도는 이런 세계 정세에 둔했다. 중국을 여전히 ‘중공’으로 낮춰 부르면서, 대만을 ‘중국’으로 부르며 여전히 떠받들었다. 

앞서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 시위를 빌미로 1971년 10월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물꼬를 텄던 남북 적십자회담도 10월 중순부터 지지부진했다. 시중엔 미·중 회담을 둘러싼 억측도 분분했다. 미국이 중국을 보듬기 위해 한국을 버렸다는 소문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동아시아 긴장 완화 차원에서 아시아에 주둔했던 45만명의 미군을 철수시켰으니 그럴 만했다.

▲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제1차한미정상회담을 했다. 사진=대통령기록관
▲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제1차한미정상회담을 했다. 사진=대통령기록관

급기야 박정희 정권은 11월23일 닉슨 대통령이 보내온 친서를 공개하면서까지 여론을 잠재웠다. 친서 공개는 외교 관례에 어긋나지만 상황이 급했다. 친서에는 “미국은 미중 회담에서 한국의 국가이익을 잊지 않을 것이고, 한국의 희생 하에 어떤 타협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었다.

1971년 12월6일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모든 국내 체제를 전시체제화 하는 6개항을 담았다. 3항에는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는 협박도 넣었다. 

그해 성탄절 아침에 서울 충무로 1가에 있던 대형호텔 대연각에 불이 났다. 대연각은 뒤로는 남산을 끼고 서울 도심 코앞이라 외교관들도 많이 투숙했다. 대낮에 불이 났는데도 21층 호텔 전층을 모두 태우고 160명 넘게 숨졌다. 

우리 언론은 대형 재난사고 때마다 사상자 숫자에 유독 민감하다. 앞다퉈 사망자 숫자확인에 혈안이다. 대연각 호텔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다. 

▲ 1971년 12월25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 총 166명이 사망했다.
▲ 1971년 12월25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 총 160여 명이 사망했다.

언론의 숫자 집착은 90년대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서해페리호 침몰까지 이어졌고, 올 봄 강원도 산불 때도 사망자 보도를 놓고 1명과 2명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68혁명을 거친 70년대 초 세계 정세는 데탕트(화해)로 향해 갔지만, 한국의 군사정부는 역주행했다. 한국 언론은 늘 군사정권의 하위 파트너로 이런 데탕트 분위기를 취재할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작은 사건사고에 집착했다. 45년이 지나 백과사전에도 오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 사망자 수는 163~168명으로 서로 다르다. 부상자 수도 63~66명으로 제각각이다. 큰 것은 취재조차 못하면서 작은 것에 집착했던 언론이 낳은 비극이다.

언론은 열흘 넘게 대연각 화재보도를 이어가면서 더 큰 보도는 놓쳤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언론이 만들어낸 여론이 모두 대연각에 쏠려 있던 12월27일 새벽 3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보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박 정권은 새로운 외교환경에 적응하기 보다는 친위 쿠데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로부터 10개월 뒤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1971년 연말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언과 국보법 날치 통과 같은 큰 주제에 정면으로 맞선 언론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정도였다. “무엇이 ‘비상’인가? 소위 국보법이라는 것이 강제시행되고 있다. 대연각호텔 불 나는 다음 날 밤 국민들 관심이 아직도 대연각에 쏠려 있는 것을 이용이라도 한 것처럼 공화당 국회의원들만 불법 협잡으로 그 법을 제정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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