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리인 역할이 아니라 이용자, 시청자 권익 보호에 충실해야 한다.” 지난해 1월 강상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은 취임 당시 이렇게 강조했다. 강 위원장은 “방통심의위를 심의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란이 된 조직이라고 지적하며 ‘개혁’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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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반환점’을 돈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 내역을 살펴보면 보도윤리, 과도한 광고 및 기만행위, 인권침해 및 차별표현 등에 제재가 집중됐다. 지난달 방통심의위는 성평등 실현 및 차별·비하 방지를 위한 자문기구인 ‘권익보호특별위원회’도 신설했다. 정부여당 대 야당 6:3 구도로 위원이 구성되는 방통심의위에서 정치적 현안으로 인한 극한 대립은 줄었고, 사안에 따라 여당 내에서도 이견이 나오는 점도 큰 변화다.

이봉우 민주언론시민연합 모니터팀장은 “인권 관련 심의를 적극적으로 했다. 특히 여성 인권, 차별 콘텐츠에 대한 심의는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이봉우 팀장은 “다만 ‘반편이’라는 표현을 장애인 차별 표현으로 제재하지 않는 등 아쉬운 점도 있다”고 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고 윤정주 위원 주도로 여성, 소수자에 대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심의가 강화된 점을 전 기수에 비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 왼쪽부터 김재영, 이상로, 이소영, 전광삼, 허미숙, 강상현, 고 윤정주, 박상수, 심영섭 위원. 사진=이치열 기자.
▲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 왼쪽부터 김재영, 이상로, 이소영, 전광삼, 허미숙, 강상현, 고 윤정주, 박상수, 심영섭 위원. 사진=이치열 기자.

 

인터넷 게시글을 다루는 통신심의에도 변화가 있다. 보수진영 일각에선 방통심의위의 5·18 민주화운동 왜곡 영상 심의를 지적하며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관련 심의는 이전 정부에서도 이뤄졌다. 오히려 4기 방통심의위에서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있는 정치적 현안이나 공인에 대한 심의는 축소되고 있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대통령에 대한 내용이나 공적 사안을 ‘사회질서 혼란’ 조항으로 심의하라는 경찰의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전 정부는 삭제했는데 이번 정부는 냉정하게 판단했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 치매설 유튜브 콘텐츠와 관련 방통심의위는 대상이 공인인 점, 관련 정보로 사회가 혼란에 빠질 정도가 아닌 점 등을 감안해 제재하지 않았다. 

통신심의에서 공인을 위한 심의가 줄어든 대신 시민을 위한 심의가 강화되는 추세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방통심의위는 디지털 성범죄 전담 심의팀을 만들고 24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했다. 2019 한국인터넷투명성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성범죄를 비롯한 권리침해 정보 심의 비율은 2014년 1.6%에서 2018년 7.3%로 늘었다.

그러나 방통심의위를 둘러싼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당시 북한이 취재진에게 1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내용의 TV조선 보도 심의는 정치 쟁점이 됐다.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은 ‘오보’가 문제라고 했으나 자유한국당 추천 위원들은 반발하다 끝내 퇴장했다. 한국당은 국정감사 때 한국당이 제기한 민원 기각률이 높다며 ‘편향’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 유튜브 신의한수 영상 갈무리.
▲ 유튜브 신의한수 영상 갈무리.

 

오히려 방통심의위가 필요한 사안에도 제대로 제재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이봉우 팀장은 “출범 때부터 정치심의를 자제하겠다고 했는데 (정치적 현안은) 판단을 아예 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지나친 발언,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비방 등이 있었다. 이런 방송에 대한 대응은 이전 기수보다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내부’ 문제와 ‘외부’ 문제로 나뉜다. ‘내부’ 문제는 심의 독소조항이 개선되지 않은 데 주요한 원인이 있다. 지난달 방송심의조항 가운데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삭제한 점은 긍정적인 변화지만 주관적 잣대로 해석할 여지가 큰 ‘공정성’ 조항은 손을 대지 못했다. ‘품위유지’ 조항도 개선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 때 풍자 방송을 내보낸 MBC ‘무한도전’은 ‘품위유지’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제재를 받기도 했다.

통신심의의 경우 검열 도구로 쓰인 ‘사회 질서 혼란’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전자파 음모론, 메르스 배후설 등 정부에 불리한 음모론 게시글을 ‘사회 질서 혼란’을 이유로 일일이 찾아 삭제한 전례가 있다.

▲ 정치적 쟁점이 됐던 TV조선 '풍계리 1만 달러' 보도.
▲ 정치적 쟁점이 됐던 TV조선 '풍계리 1만 달러' 보도.

 

4기 방통심의위는 ‘정치적 표현물 자율규제 전환’을 과제로 내걸었지만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정부 주도의 ‘가짜뉴스 규제론’이 힘이 실리면서 주춤하는 모양새다. 공인에 대한 심의는 지양하면서도 혐오·차별 콘텐츠 대응을 강화하는 방식의 ‘묘안’이 필요하지만 정치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등 관련 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방통심의위에도 제동이 걸려 있다. 결국 현행 기준으로 무엇이 ‘혐오’이고 ‘차별’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외부 요인은 지배구조에 있다. 방통심의위가 어떻게 심의하더라도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정부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 구조에 있다. 정당 추천 위원은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근혜 정부 때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를 낙마하게 한 KBS 보도 심의 당시 중징계를 반대했던 정부여당 추천 윤석민 위원이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구조를 갖기에 어떤 결정을 해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아 필요한 심의도 못 하는 등 소극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김동찬 사무처장은 “정치 권력이 교체되거나 다른 위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도 이 상태가 유지될지 의문”이라며 “위원을 뽑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지만 진전이 없다. 심의기구 및 심의대상의 축소, 심의 기준의 완화 등을 요구해 왔는데 방통심의위가 스스로 하기에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도, 스스로 개혁 주체가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19대 국회 때는 민주당이, 20대 국회 때는 한국당이 방통심의위 구조를 개편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야당 의원들이 발의한 이들 법안은 야당 추천 위원 수를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여야 위원 수 조정에 그치지 않고 추천단체를 사법부, 시민사회 등으로 확대하는 방안과 심의 제도 자체에 대한 손질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미디어 기구 위원 가운데 특정 성이 60%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

4기 방통심의위는 ‘시민참여 활성화’ 방안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19대 때 최민희 의원은 심의 민원을 제기한 민원인에게 회의 발언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민언련은 시민이 심의에 참여하는 ‘시민 배심원제’를 제안했다. 방통심의위 내부에선 시민참여를 강화하면서도 특정 정치집단이 악용할 수 있는 역기능 없이 풀어내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평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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