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 지난 7월 시행된 지 100일을 맞았다. 사업주가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조치하도록 명시해 이른바 직장갑질을 예방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정작 장시간노동과 저임금, 임금체불로 악명 높은 방송제작환경에서 법 시행 영향은 미미하다. 애초 방송·제작사가 스태프와 근로계약을 맺는 경우가 드물어 근로기준법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 구조라서다. 

지난 8월 한 대형 방송사 드라마제작 중 촬영감독이 소속 팀원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는 제보가 나왔다. 방송스태프들이 직장 갑질을 신고하기 위해 개설한 오픈채팅방을 통해서다. 신고 사실이 알려지자, 감독은 촬영팀 스태프를 집합시킨 뒤 스태프의 핸드폰을 일일이 검사했다.

근로기준법 76조 2항(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에 따르면 폭언과 제보자 색출은 모두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우월적 지위로 △업무상 범위를 넘어 △심리·신체 고통을 주거나 업무환경을 악화하는 행위에 들어맞는다. 피해자들은 괴롭힘 사실을 어느 회사에도 알리지 못했다. 스태프는 방송사와 제작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회사는 이들과 근로계약이 없다. 시행된 법은 사업주가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3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스태프노동자와 방송사·제작사 사이 근로계약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방송제작 환경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개선하기 어렵다.

방송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은 이른바 ‘턴키’ 계약을 맺고 일한다. 회사가 각 팀의 감독과 도급계약을 맺고, 감독은 지급받은 제작비로 이하 팀원 인건비를 모두 책임지는 방식이다. 회사와 각 팀 감독은 근로계약이 아닌 사업자 간 계약을 맺는다. 대부분이 일회성 프로젝트로, 스태프들은 프리랜서 계약을 맺거나 아예 맺지 않기도 한다.

▲ 사진=gettyimages
▲ 사진=gettyimages

현행 스태프 고용구조가 직장 내 괴롭힘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턴키 도급계약은 노동시간이나 임금기준을 정하지 않는다. 촬영 일정은 빠듯하고, 대기 시간은 길고, 업무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홍수경 매니저는 “스태프가 장시간 저임금 고강도노동에 내몰리는데 특유의 도제 문화, 인맥에 기대는 문화가 더해져 업무와 전혀 무관한 갑질이 일어난다. 피해자가 문제 제기하면 갈 곳이 없다”고 했다. 

홍 매니저는 “불안정 고용과 장시간·저임금 노동 문제는 직장 내 괴롭힘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외려 당장 노동시간과 임금체불 문제가 심해, 직장 내 괴롭힘은 제보 순위에서 부수로 밀려나는 실정”이라고도 했다.

노사가 상황을 개선하려고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합의했지만 기약없이 미뤄지고 있다. 언론노조·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지상파3사·드라마제작사협회로 구성된 ‘지상파방송 드라마제작 환경 개선 공동협의체’는 지난 6월 표준근로계약과 노동시간 단축을 골자로 한 ‘지상파방송 드라마 제작환경 가이드라인 기본합의서’를 맺었다. 9월에 세부조항에 합의해 10월부터 도입하기로 했지만 현재까지 실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의무 아닌 ‘표준’에 그쳐 얼마나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당초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사업주가 자율 해결을 유도하려는 취지다. 근로기준법 적용 예외이거나 법적 근로자성 자체가 다툼이 되는 상황에서는 그 실효성이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윤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10인 이상 사업장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내용을 포함하도록 의무화했다. 방송사가 취업규칙을 소속 노동자뿐 아니라 일터 괴롭힘 전체에 책임 지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며 “고용노동부가 권고해야 할 부분”이라고 조언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