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가 성희롱 피해자 동의 없이 보도해 피해자가 SBS 기사 삭제를 요청했는데 법원이 SBS 손을 들어줬다. 앞서 언론중재위원회는 SBS에 기사를 삭제하고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결정했지만 법원은 중재위 결정을 뒤집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김병철)는 지난 16일 성희롱 피해자 A씨가 자신의 명예권·인격권을 침해했으니 기사를 삭제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지만 “SBS가 A씨 명예를 훼손하거나 사생활을 위법하게 침해하지 않았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SBS는 지난해 4월 메인뉴스에서 한 기업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을 단독 보도했다. ‘최근 회사를 떠난 A씨가 퇴사과정에서 고위 임원의 접대성 술자리 참석 강요사실을 털어놨다’, ‘A씨가 국민권익위에 제보했다’ 등 내용을 전했다. 해당 기업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SBS 보도를 다른 매체가 인용하면서 “퇴사자의 제보”, “A씨가 폭로했다” 등 A씨를 제보자로 표현했다.   

보도 직후 A씨는 ‘제보자 너 맞느냐’, ‘인기인이다’, ‘심경변화가 있어 제보했느냐’ ‘소송하겠다’ 등 협박을 포함한 연락 100건 이상을 받아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SBS가 기업 이름, 피해자 직급, 대략의 퇴사 시점, 술자리를 강요한 임원 개인정보 등을 밝히며 A씨를 특정했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A씨는 제보자가 아니었고 성범죄 사건이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SBS 사옥. 사진=연합뉴스
▲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SBS 사옥. 사진=연합뉴스

A씨는 지난해 6월 언론중재위에 SBS 기사와 이를 인용한 5개 매체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언론중재위는 SBS에 해당 기사 삭제와 300만원 손해배상 조정결정을 내렸다. SBS를 인용한 매체는 1곳에 기사 삭제, 4곳에 손해배상과 기사 삭제를 결정했다. SBS만 이에 불복했다. A씨는 지난해 12월 “회사와 가해 임원, 친분 없는 동료, 일반인(악플) 등에게 ‘배신자’ ‘제보녀’라는 비난을 받았다”며 법원에 기사삭제와 손해배상을 요청했다. 

SBS는 지난 8월 준비서면에서 해당 기사에서 A씨를 특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겠다며 A씨가 다니던 기업 인사담당자 증언을 첨부했는데 해당 담당자는 보도를 보고 A씨인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SBS는 해당 담당자가 A씨 정보를 미리 알고 있어서 파악할 수 있을 뿐 외부인은 알기 어려운 정보라며 자신들이 A씨를 특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SBS는 “A씨가 받은 피해를 이미 충분히 보상받았으니 남은 손해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SBS 보도로 A씨가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해당 기업에서 이미 이를 보상했으니 SBS가 A씨에게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A씨와 해당 기업은 2차 피해 등을 이유로 기업이 A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기업 측이 A씨 관련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해당 기업 관계자는 합의 취지와 달리 법원서면을 보면 SBS쪽에 A씨 관련 얘기를 했다. 

SBS는 보도의 공익성을 부각했다. SBS는 해당 기업 담당자 증언 등을 근거로 “이 기사로 사실조사가 진행됐고 가해 임원에 대한 조치와 재발방지 조치들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SBS 서면을 보면 기업 담당자는 “가해 임원은 보도 이후 조사과정에서 사직원을 제출했다”고 전했다. 

▲ 사진=pixabay
▲ 사진=pixabay

‘SBS가 A씨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재판부는 SBS가 기업이름, 가해임원이 승진한 시점 등을 보도한 걸 근거로 “가해자가 특정되고, 이에 따라 피해자도 특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피해사실을 제보하거나 인터뷰한 것처럼 오인하도록 보도했고 피해사실을 국민권익위에 제보했다는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면서도 “이것만으로 A씨의 사회적 가치나 평가를 침해하기에 충분한 사실적시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SBS가 ‘가해 임원이 자신의 승진을 위해 직원들을 접대성 술자리에 참석시켰고 A씨가 이 중 한명’이라는 내용을 보도한 이후 A씨는 ‘술자리를 통해 승진했다’는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SBS가 사실을 적시했을 뿐 “A씨가 접대성 술자리를 통해 승진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도 내용을 문자 그대로 봤을 뿐 그 파장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다.

A씨는 준비서면에서 “언론보도로 인한 2차 피해를 논하는 논문에선 그간 법원이 언론의 공익성을 폭넓게 인정해 2차 피해를 경시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실을 지적했다”며 “피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고 극복하는 방법이 다양할 수밖에 없어 누구에게나 ‘투사’가 되라고 강요한다면 이 역시 폭력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사생활 침해 부분에 “뉴스에는 A씨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는 정보가 포함돼 있는데 A씨 입장에 섰을 때 공개되기 바라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다가, 성희롱 사건 피해자에 대해 잘못 가해질 수 있는 선입견이나 선정적 호기심을 고려하면 A씨로서는 위 정보가 공개됨으로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며 “SBS가 이를 공개한 건 사생활의 자유 침해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판단은 달리했다. 재판부는 “A씨의 피해사실은 공공의 이해와 관련돼 공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해당하고 그 공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공개의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SBS 뉴스가) 직장 내 성희롱이 있었고 해당 기업이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실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A씨에 대한 명예훼손적 사실 보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희롱 사건을 알린 공익성이 더 크다는 판단이다. 

사건의 핵심은 A씨는 건강상 이유로 퇴사하면서 사내 극소수 담당자에게만 성범죄 사실을 얘기했는데 A씨 동의 없이 이 사실이 언론에 흘러갔고 언론이 이를 A씨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보도한 것이다. 재판부는 SBS 보도로 A씨가 특정됐고, A씨가 제보 인터뷰를 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A씨 주장을 기각했다. 

실제 다수 언론이 성범죄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보도하지 않고 있다. 성범죄 사건을 알릴지 말지 최종 판단을 피해자에게 구하는 이유는 성범죄 신고율이 2~6%에 그칠 만큼 피해자들이 겪을 고통이 크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도 A씨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SBS 보도 이후 가해 임원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했다. 

지난해 2월 한 종합일간지가 1면에 정부기관발 성범죄 보도를 했는데 온라인에서 몇 시간 뒤 해당 기사를 삭제했다. 미디어오늘이 삭제 경위를 묻자 해당 일간지 관계자는 “팩트가 틀리진 않았지만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당시 수사기관을 출입하는 한 방송기자는 미디어오늘에 “감찰 단계에서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조사도 안하는 게 성범죄 건”이라며 “사건을 확인했다고 죄다 기사화하는 건 명백한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  

▲ 언론중재위원회.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언론중재위원회.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4조(피해자의 신원과 사생활 비밀 누설 금지)를 근거로 한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 심의기준 제4조(성폭력 피해자 보호)에서 “언론은 (성폭력) 피해자 당사자 동의 없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내용을 공표해선 안 된다”고 했다. 언론중재위는 이 심의기준을 근거로 SBS 기사를 삭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국기자협회·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등이 지난해 만든 ‘성폭력·성희롱 보도수첩’에도 “취재과정에서 피해자나 가족에게 심각한 2차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의 권리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합한 보도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름, 나이, 주소를 공개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 근무지, 경력, 가해자와의 관계, 주거 지역 등 주변정보들의 조합을 통해서도 피해자 신원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등을 규정했다. 

[관련기사 : 성희롱 피해자 동의 없었던 SBS 성희롱 보도]
[관련기사 : 피해자 동의 없는 SBS 성희롱 보도, 법정으로]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