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조커’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10월 초 개봉한 토드 필립스 연출,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영화 ‘조커’가 뜨겁운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커’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개봉한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보았던 ‘다크 나이트’의 417만 관객을 10월18일 돌파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이 쉽지 않은 일본에서도 2주 연속 1위을 달성하며 심상치 않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전세계가 ‘조커’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중이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짐은 ‘조커’가 지난 9월 초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을 때부터였다. 소위 ‘예술영화’가 아니면 본상 수상을 넘보기도 쉽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가, 다른 영화도 아니라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만화 원작의 안티-히어로 영화에 대상을 수여했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술렁였다. 본래 ‘행오버’ 시리즈 같은 성인 코미디 영화를 전문으로 연출, 제작하던 토드 필립스가 ‘조커’를 연출한다는 소식에 조금은 심드렁했던 여론은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과 함께 예고편과 스틸 사진이 조금씩 공개되면서 점차 반전됐다.

‘조커’의 흥행이 점차 순항을 유지하는 사이에, ‘조커’에 대한 논란도 함께 커져간다. 가장 큰 논란은 영화가 배트맨 시리즈를 대표하는 악역인 ‘조커’의 탄생과 기원을 그리는 모습이 ‘화이트 트래쉬’(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백인 빈민층) 남성의 폭력을 정당화시킨다는 논란이다.

‘조커’의 표현을 옹호하는 편에서는 본래 만화 원작에서도 ‘조커’의 탄생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점차 세계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가 고착화되는 와중에 서민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뚜렷한 대책이 없는 현실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들은 ‘조커’에서 묘사되는 만성적 실업과 심화되는 양극화, 그리고 본격적으로 ‘조커’가 되기 전에도 지속적 정신 질환과 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모습을 근거로 적극적 사회 보장 정책의 도입을 영화가 던지는 교훈이라 설명한다.

동시에 ‘조커’에서 빈민층 남성이 여러 구조적 폭력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빌런’(villain, 창작물에서 악역을 뜻하는 영단어. 한국에서는 주로 히어로물의 악역을 칭하는 단어로 주로 사용)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사회가 두려워해야 함을 말한다.

▲영화 '조커'의 스틸컷.
▲영화 '조커'의 스틸컷.

반면 ‘조커’의 표현을 문제적으로 여기는 입장에서는 영화가 구조적 어려움을 핑계 삼아 폭력적 행위를 더욱 확산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 작중에서 아서 플렉은 분명 쉽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궁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궁지는 아서 플렉 뿐만 아니라 작중의 우울한 세계관에 놓인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로 보인다. 그 문제를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폭력과 살인으로 빠져나가며 점차 악역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긍정적이거나 통쾌하게 그려나가는 모습을 몇몇 이들은 걱정하고 있다. 특히 2012년 미국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 중인 극장에 조커 분장을 한 청년이 총기 난사로 12명의 시민을 숨지게 만든 사건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조커’의 행동에 ‘그럴 듯한 이유’를 덧붙이는 영화의 설명법은 자칫하면 동종 범죄나 사회적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을 이들은 두려워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조커’의 개봉을 앞두고 총기 난사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영화 상영관을 중심으로 엄중한 경계 태세를 갖추기도 하였다.)

‘조커’는 너무나도 유해한 영화거나, 또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촉매 역할을 하는 작품인가? 영화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빠른 흥행 속도를 보이는 상황에서 ‘조커’에 대한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평론가들나 문화 칼럼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조커’에서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을 찾고, 다시 누군가는 ‘조커’에서 사회를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문제점을 찾기에 골몰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조커’라는 작품이 뜨거운 감자로 자리 잡게 되었느냐다. ‘조커’는 분명 강렬한 표현으로 가득한 작품이고, 동시에 지금까지 제작되었던 만화 원작-히어로 영화들은 물론 악역을 전면으로 내세웠던 영화 ‘캣우먼’이나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의 작품과도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게다가 굳이 만화하고의 연관성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만화에서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던 구체적 시대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영화는 만화 원작에 크게 기대지도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가 처음 제작되는 순간부터 개봉 직전까지도 ‘조커’는 자신들이 이전까지의 히어로 영화하고는 다른 길을 걷고, 논쟁적 작품이 될 것임을 자인했다. 그러나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조커’는 강렬한 동시에 비어 있다. 영화는 주인공 ‘아서 플렉’에게 점차 밀려드는 폭력과 충격의 굴레를 통해 주인공이 ‘조커’가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과 함께 클라이맥스 파트의 대규모 소요 장면을 통하여 작품 내에서는 물론 작품 밖에 있는 사람들도 ‘나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악역이 탄생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폭력의 양상은 철저히 우연에 기초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우연히 직장 동료가 ‘총알과 총’을 건네 줬고, 그것이 일하는 도중에 밖으로 흘러 나오며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사정에 더욱 타격을 미친다. 모든 것이 꼬여가는 와중에 하필 ‘거대 금융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이 그를 모욕하고 조롱하면서 아서 플렉은 총을 쏴 최초로 폭력과 살인을 행사했다. 매우 끔찍한 살인이지만 아서 플렉의 광대 분장은 금융 회사의 하수인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광대 분장은 ‘정의의 상징’이 되어 주인공은 자신의 살인 행각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동시에 은근슬쩍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 영화의 중요한 플롯이다.

▲영화 '조커'의 스틸컷.
▲영화 '조커'의 스틸컷.

주인공이 최초로 폭력을 저지르는 와중에서 ‘계급’은 물론 ‘계층’도 없다. ‘영화에는 항상 당대의 이슈가 반영된다’고 말하던 감독의 인터뷰와 달리, 각본상으로 매우 아슬아슬하고 우연의 연속으로 이뤄진 폭력적인 행위만이 존재할 뿐 그 폭력은 무척이나 얇은 정보값만을 지닌다. 애시당초 처음 아서 플렉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그가 놓인 계급적-계층적인 상황은 무척이나 얇은 상황에서, 그가 우연한 계기로 폭력을 행사하고 다시 그 행위가 사회 전반에서 ‘정당한 행위’로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플롯만이 강조될 뿐이다.

이후의 전개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으며, 긍정적으로 보였던 일은 모두 주인공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 와중에서 권력을 지닌 ‘기득권층’은 무척이나 상투적으로 무례하고 위선적인 존재로 그려지며, 공무원들은 철저히 무력하거나 무능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 안에서 계급과 계층은 드러나지만, 그러한 요소가 주인공에게 어떠한 정체성을 구축하는지는 영화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끝을 맺는 순간까지, 영화는 주인공이 폭발하는 과정과 순간에만 초점을 기울인다. 그 안에 ‘분노’와 ‘소동’은 많지만, 그 모습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영화는 무척이나 얼렁뚱땅 넘어갈 따름이다.

어떤 의미로 ‘조커’에서 보이는 ‘소동’의 양상은 마치 감독 토드 필립스가 이전에 연출했던 ‘행오버 시리즈’나 제작했던 작품인 ‘프로젝트 X’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으로 우연한 계기로 소동을 일으키거나 휘말려 사건이 계속 벌어지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가까스로 문제를 봉합한다. 코미디 장르에서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건에서 발생하는 코믹한 광경과 심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비슷한 방식을 감독은 서스펜스 장르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영화가 여러모로 비어 있는 상황에서, 반응만은 무척이나 뜨겁고 쉽게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영화 안보다 영화 바깥이 더욱 영화적인 재미를 준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에 대해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투사하는 양상들이 아닐까.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영화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영화의 빈틈을 자신들이 지닌 사회에 대한 인식 또는 사회와 부대끼고 충돌하며 지녔던 부정적 감정들로 메꿔 영화를 고평가한다. 그 반대편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영화가 지닌 윤리적인 문제나 영화가 만들 수 있는 영향들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빈틈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결합시키거나 쉽게 망각하며 넘긴다. 어떤 점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이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외부적인 시선이 영화에 대한 입장과 상관없이 서로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영화를 해석하고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에 대입할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조커’를 문제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사실 ‘조커’에 대해 문제적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과 구조 그 자체다. 동시에 ‘조커’를 놓고 벌이는 희비극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영화’라는 매체에 많은 이들이 오랜 기간 동안 영화에 기대를 가졌던 ‘사회를 변화하는 촉매로서의 존재가치’가 지금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서는 존속하기 어려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러한 문제는 영화 ‘조커’뿐만 아니라, 매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만들었던 영화 상당수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마치 김어준이나 이상호가 만들었던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이 포장만 거대하고 이렇다 할 가치나 실속은 없었듯 말이다. 도리어 지금 견지해야 할 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한계 자체를 인식하며, 영화는 물론 영화에 대하여 논하는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까. 영화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완전히 냉소적 길을 가는 것도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특성을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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