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던 노동자의 임금체불 사건을 수임한 적이 있다. 근로계약서에는 근로시간이 10시~22시라고 적혀 있었으나 아침 9시부터 출근을 시키던 사업장이었다. 오전에 1시간씩 일찍 출근한 부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을 청구하던 건이었다. 그러나 출퇴근 기록부도 없고 근로시간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딱히 없었다. 노동청에서 사업주와 대질조사를 하였다. 노동자가 ‘아침 9시부터 출근을 하도록 지시했다’ 고 진술하자 사업주는 ‘증거 있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래서 ‘9시부터 일 시킨 적이 전혀 없으세요?’라고 묻자 ‘증거가 있냐고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제 나도 안다. 물증 없이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젓가락으로 국물 떠먹는 것만큼 갑갑한 일이라는 것을.

법률절차에서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근로기준법의 벌칙규정을 읽어보면 법 위반 시 징역 또는 벌금 혹은 과태료 부과로 되어 있다. 즉, 형사절차라는 것이다. 노동부와 검찰에서 명확한 증거 없이 사업주에게 시정조치와 과태료 또는 벌금을 부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노동권 침해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매일 녹음기를 켜고 다니고, 근로관계에 관한 온갖 서류에 눈에 불을 켜고 사진을 찍어서 증거 수집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사업주에게 그러한 행위가 드러나는 경우 ‘사업장 내 신뢰관계를 해치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 녹음기. 사진=gettyimagesbank
▲ 녹음기. 사진=gettyimagesbank

 

나도 상담하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사업주와의 대화나 통화를 녹음을 해두라는 조언을 할 때도 있지만 -물론 대화 당사자에 본인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 불법녹취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하는 행위가 어딘가 찜찜하여 난색을 표하는 분들도 꽤 있다. 어르신들의 경우 핸드폰을 다루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어 음성녹음이나 통화녹취를 시도하기 무리일 때도 많다.

근로기준법 제42조를 보면 사용자는 노동자 명부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근로계약에 관한 중요한 서류를 3년간 보존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서류란 근로계약서, 임금대장, 임금의 결정·지급방법과 임금계산의 기초에 관한 서류, 고용·해고·퇴직에 관한 서류, 승급·감급의 관한 서류, 휴가에 관한 서류, 3개월 이내의 탄력적 근로시간제 합의서, 선택적 근로시간제 합의서, 재량 근로시간제 합의서,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관련 합의서, 연소자 증명에 관한 서류를 말한다.

근로기준법 제42조에서 보존 대상으로 규정된 서류들은 노동분쟁 시 입증이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서류들은 보관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사업장 내에서 위 서류들이 제대로 보관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노동청 진정 시 사업장에 대한 위 서류들에 대한 보관여부도 좀 더 철저히 조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근로기준법 제 42조에서 말하는 모든 서류들에 대하여 서면 교부의무를 부여하기는 무리겠지만 임금구성항목을 보여주는 임금대장과 근로시간이 기록된 출퇴근기록만큼은 노동자가 요청하는 경우 교부하도록 규정했으면 한다. 실제로 서울노동권익센터를 찾는 시민들은 임금산정방식이나 세금공제방식에 대한 사업주의 불충분한 설명에 답답해하고 연장근로에 대한 입증자료가 부족하여 노동청 진정 절차에서 난항을 겪는다. 어떤 식당 노동자는 4대보험도 가입하지 않았고 임금은 전부 현금으로 받았는데 10년 간 일한 퇴직금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스레 문의하였다. 근로관계, 임금, 근로시간 등에 대한 자료 확보가 어려운 대다수의 노동자로서는 눈뜨고 코 베일 수밖에 없다. 만약 노동자에게 근로관계에 관한 자료를 교부해달라고 요구할 법적 근거가 생긴다면 ‘증거 있어요?’라는 말이 책임 회피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일이 다소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