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아마 ‘달빛천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기억할 것이다. 본래 타네무라 아리나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2004년 투니버스를 통해 방송되며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평이한 수준으로 관심을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본국이 아닌 해외에서 더욱 거대한 반향을 이끌어낸 셈이다. ‘달빛천사’가 한국에서 더욱 사랑을 받은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로 2004년부터 시작된 ‘프리큐어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 ‘여성 주인공 변신 애니메이션’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면, 한국은 꾸준히 이러한 장르가 사랑을 받아온 차이가 있다. 또한 ‘달빛천사’의 통속적이면서도 시청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자극하는 스토리와 심리적인 표현이 한국 시청자에게 더욱 깊게 다가온 지점도 있으리라.

하지만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일본판에는 없는 한국판만의 고유한 요소가 아닐까. 일본에서 ‘달빛천사’를 방영할 때는 주인공 ‘루나’를 비롯한 주연진들의 목소리 연기를 성우가 아니라 아이돌이나 배우들이 담당했다. 상당수의 상업 애니메이션이 그렇듯이, ‘달빛천사’ 역시 철저하게 상업적인 목표를 담아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소녀가 아이돌로 변신해서 노래를 통해 조금씩 성장한다는 스토리에 맞춰 홍보를 진행하기 위하여 주인공 ‘루나’의 일본 성우는 당시로서는 데뷔한지 얼마 안 된 아이돌 가수 myco에게 돌아갔다. 전문적인 성우가 아니었던 탓에 myco의 연기는 계속 혹평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전문 분야라 칭할 수 있는 노래마저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반면 한국판의 경우,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을 수입하는 입장이었기에 ‘달빛천사’ 애니메이션에 개입된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동시에 2000년대 초중반의 투니버스는 대원미디어의 ‘챔프’를 제외하면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에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던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한국에 어울리도록 수정하는 작업에 충분히 많은 신경을 쓸 수 있었다. 그 결과 ‘달빛천사’는 한국에서 일본 방영판보다 훨씬 좋은 품질의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특히 주인공 ‘루나’ 역을 맡은 성우 이용신은 성우가 되기 전에 CM송 가수로 오랜 시간 활동한 경력을 토대로 연기는 물론 노래까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달빛천사’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세를 얻은, 2000년대 중반 방송된 ‘추억의 애니메이션’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 속에 남았다.

그렇게 계속 추억에 남아있을 것 같은 작품에 갑작스럽게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난 2019년 9월 27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 올라온 ‘달빛천사 15주년 기념 국내 정식 OST 발매’에 10월 11일 기준으로 20억원 이상의 후원액이 모인 것이다. 지금까지 ‘달빛천사’에 사용된 한국판 OST는 투니버스에서 처음부터 순수하게 제작한 오프닝 노래 ‘나의 마음을 담아’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에서 제작된 노래를 번안한 작품이었다. ‘나의 마음을 담아’가 투니버스가 제작한 OST 컴필레이션 앨범 ‘WE3’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판권 문제 등으로 인해 ‘달빛천사’의 한국판 OST는 정식으로 음반이나 음원으로 발매한 적이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콘서트나 행사를 통해 성우 이용신 본인이 노래를 부른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여전히 ‘달빛천사’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가 되더라도 좋으니 ‘달빛천사’의 한국판 노래가 정식으로 출시되어 소장하길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달빛천사’는 한국에서 방영한지 15년이 훌쩍 넘어가는 작품이다. 방영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15년이 지난 후에도 팬들이 움직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성우 이용신이 텀블벅의 후원 요청문에 남긴대로 “올해 5월 이화여대 축제에서 ‘달빛천사’의 삽입곡을 부른 직캠 영상이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끈 것”이 한동안 꿈으로만 남아있던 달빛천사의 한국판 OST가 다시 나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긴 했지만, 팬들의 열망이 실제로는 어떤 수준으로 드러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달빛천사 15주년 기념 국내정식 OST 발매' 프로젝트를 위한 텀블벅 홈페이지.
▲'달빛천사 15주년 기념 국내정식 OST 발매' 프로젝트를 위한 텀블벅 사이트 내 링크.

조심스레 성우 이용신은 목표금액을 3,300만원으로 설정하며 ‘달빛천사’의 한국판 OST 제작비를 모으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개시했다. 하지만 팬들의 열기는 성우 이용신의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다.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한지 하루 만에 목표금액의 10배 이상인 4억원을 모았다. 10월1일에는 모금액이 10억원을 넘었고, 급기야 10월8일에는 20억을 돌파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에 후원자들에게 지급하는 ‘리워드’(reward, 후원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제공하는 물품)도 풍성해졌다.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USB로 내고자 했던 앨범 포맷에 CD도 기본 구성으로 추가되었고, 15년 전 ‘달빛천사’의 녹음에 참여한 성우들의 싸인 엽서도 리워드에 포함되었다. 여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12월에는 ‘달빛천사 OST 콘서트’와 ‘성우 이용신 팬미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그저 15년 전 방송한 애니메이션의 추억을 되새기자는 의미로 출발한 계획은 어느덧 공연 기획을 논하는 수준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달빛천사’의 한국판 OST 발매 프로젝트에 20억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이 모이게 만들었을까. 물론 가장 큰 요소는 ‘달빛천사’가 2004년 한국 방송 당시에 지녔던 파급력이다. 일본판보다 훨씬 호평을 들었던 성우들의 연기와 압도적인 노래의 퀄리티는 여전히 많은 시청자들의 추억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한국판 OST는 15년이 지나는 동안 제대로 감상하거나 소장할 기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달빛천사’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던 성우 이용신이 2019년 현재에도 꾸준한 인기와 유명세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작은 이미 충분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불이 붙을 기회만이 없었을 뿐이다. 이화여대 축제의 성우 이용신이 부른 ‘달빛천사’의 노래는 장작에 불을 붙일 계기를 만들었고, 텀블벅 후원 개시는 확실하게 불길을 키우고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1년 6월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텀블벅’은 2019년 현재 후발주자인 ‘와디즈’와 함께 한국 크라우드 펀딩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유캔펀딩’이나 ‘오마이컴퍼니’가 스타트업을 비롯한 기술 위주의 모금에 치중했다면 ‘텀블벅’은 주로 문화, 예술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대한 후원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다. 상대적으로 기술과 관련된 펀딩의 종류는 약하지만, 문화-예술과 관계된 프로젝트에 있어서는 ‘텀블벅’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이름값을 지닌다.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관심도가 폭증한 독립출판물 행사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텀블벅’이 별도로 홍보 부스를 낼 정도이다.

‘텀블벅’은 약 9년 간의 역사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 분야의 후원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동시에 그 프로젝트들은 상대적으로 매니아한 면모가 강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문화 산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쉽게 도전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류적인 업계에서는 잘 다루지 않거나 기피했던 만화, 소설, 에세이, 일러스트집, 음악, 게임, 공연 프로젝트 등이 ‘텀블벅’을 통해서 제작비나 유통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감히 시도하는 것도, 꿈꾸는 것도 어려운 프로젝트들이 ‘텀블벅’을 통해 실현의 계기를 만들었다.

▲'텀블벅' 메인 홈페이지 화면.
▲'텀블벅' 메인 홈페이지 화면.

이번 ‘달빛천사’ 한국판 OST 모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20억이라는 모금액은 절대 작지 않은 수치이지만, 후원자는 10월 11일 현재 58,854명 정도이다. 지금까지의 후원자수를 곧 ‘음반 판매량’으로 환산한다면, 이미 줄어들대로 줄어든 음반 시장에서는 마냥 작다고 말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니지만 대중적이라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물량이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모인 후원액은 여전히 ‘달빛천사’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보이는 수치지만, 역설적으로 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달빛천사’의 한국판 OST가 진작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보이는 수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동안 ‘수치’로 드러내지 않았던 ‘달빛천사’에 대한 팬덤의 크기가 최초로 정량화된 수치로 드러난 계기기도 하다.

이렇게 ‘텀블벅’은 하나의 군집을 이루지 않거나, 명확한 실체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매니아와 팬덤을 결집시키는 문화-예술 분야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에 기꺼이 돈을 내는 이들은 때로는 한국의 주류 시장에서 쉽게 충족할 수 없는 자신의 취향을 찾는 것에 돈을 쓰고, 다시 때로는 시장에서 계속 변방에 밀려나있던 창작물- 혹은 창작자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돈을 쓴다. 2010년대 이후로 독립출판물, 독립만화 등의 시도가 활성화가 되었던 계기도 한편으로는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의 대두가 미친 영향을 반드시 짚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텀블벅’에 모든 것을 맡겨 놓을 수만은 없다. ‘텀블벅’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스타트업 플랫폼이며, 결국 어떤 순간에는 이해 관계와 충돌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상존하다. 텀블벅이 출범한 전후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은 각자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이어나갔다. 지난 9년 사이 텀블벅의 아성에 도전하는 크라우드 펀딩들이 수도 없이 명멸했으며, 2019년 현재에도 적극적으로 낮은 수수료를 자신들의 장점으로 미는 후발 플랫폼들이 서서히 나오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플랫폼 역시 소비자들의 취향과 관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시장’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 역시 아니다.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텀블벅’은 그동안 뭉치기 어려웠던 팬과 매니아의 요구를 하나로 모으고, 지속 가능한 문화 창작의 방안을 모색한다는 차원의 의의는 분명 존재한다. 그런 차원에서 텀블벅을 통한 ‘달빛천사’ 한국판 OST 크라우드 펀딩에 20억이 모인 것은 성과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에 ‘텀블벅’은 응집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텀블벅’을 통한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에도, 매니아 문화는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꾸준히 생기를 지니며 유지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은 결국 창작자와 팬들이 스스로 보이는 수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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