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국에도 검열의 흑역사가 있다. 핀란드는 12세기 이후 700년 가까이 스웨덴 속국이었다. 곧이어 1917년까지 100여년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핀란드는 세계 언론자유지수 2위 국가다. 2010년부터 줄곧 1위 자리를 지킨 뒤 최근 3년 간 2~4위를 오르내린다.

지난달 20일 찾은 헬싱키 중앙역 인근 ‘빠이발레흐띠(Päivälehti)’ 박물관은 핀란드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흑역사를 다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 벽면과 천장을 뒤덮은 색색의 패널들이 눈에 띈다. 길쪽한 패널에 세계 미디어사를 움직인 사건들을 써넣고 시간 순으로 붙였다. 마주보면 벽면이 눈앞에서 쏜살처럼 지나가는 모양새다. 빠이발레흐띠 박물관 측은 이 벽면을 전체 전시의 중심 축이라고 소개했다.

미디어기술 발명은 보라색, 검열 사건은 검은색 패널에 썼다. 맨 오른쪽 끝 검은 패널엔 지난 2013년 미 국가안보국의 전세계인 상대 감시시스템을 알린 에드워드 스노든 폭로 사건이 적혔다. 핀란드 언론사에 남을 사건, 미디어 관련 학문적 발견, 역사를 바꾼 보도 등도 각자 색깔로 표시했다. 핀란드와 관련해선 ‘핀란드인의 3분의1은 언론이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고 감춘다고 생각한다’는 연구 결과를 적었다. ‘최신 흑역사’는 미국 상원이 ‘언론은 국민의 적이 아니다’란 언론자유 지지 결의안을 채택해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한 사건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 패널이 덧붙는다.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빠이발레흐띠’ 박물관. 사진=김예리 기자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빠이발레흐띠’ 박물관. 사진=김예리 기자
▲박물관에 들어서면 벽면과 천장을 뒤덮은 색색의 패널들이 눈에 띈다. 세계 미디어 역사를 벽면에 타임라인으로 표현한 전시물이다. 사진=김예리 기자
▲박물관에 들어서면 벽면과 천장을 뒤덮은 색색의 패널들이 눈에 띈다. 세계 미디어의 역사적 사건을 표현한 타임라인 전시물이다. 사진=김예리 기자

빠이발레흐띠는 핀란드어로 ‘매일’이다. 이는 핀란드 최대 일간지 ‘헬싱긴 사노맛(Helsingin Sanomat)’이 1889년 창간할 당시 매체 이름이다. 헬싱긴 사노맛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창간한 만큼, 이 신문의 역사는 핀란드 역사이자 검열·자유의 역사다. 박물관은 ‘헬싱킨 사노맛 재단’ 산하 기관으로, 재단이 관리‧운영한다. 박물관 자리는 빠이발레흐띠가 130년 전 창간할 당시 입주한 곳이다.

최대 일간지 헬싱긴 사노맛 재단, 세계 언론자유 과거와 현재 기록

빠이발레흐띠는 핀란드어로 창간했다. 대부분 언론이 스웨덴어로 보도하는 데다 러시아 제정 아래 놓인 상황에서  이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매일신문’이란 이름에 핀란드어로 보도하는 행위는 러시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빠이발레흐띠는 결국 정부 압력으로 5년 뒤 문을 닫았다. 수개월 뒤 ‘헬싱키 소식(헬싱긴 사노맛)’이란 이름으로 편집국장을 바꿔 다시 문을 열었다. 기자들은 핀란드어로 보도를 이어갔다.

박물관 한가운데엔 핀란드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을 다룬 헬싱긴 사노맛 지면을 전시한 공간이 놓여 있다. 빠이발레흐띠 창간과 무기 휴간, 1905년 총파업과 1917년 핀란드의 독립 등을 다룬 지면을 영구 전시 중이다. 방문객은 빠이발레흐띠와 헬싱킨 사노맛 지면을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다. 아이꾸 메우라 큐레이터는 기자와 연구자들이 박물관을 찾아 지난 보도들을 살펴본다고 말했다.

그 옆엔 벽을 따라선 세 개의 붉은 우편함 모양 기기가 서 있다. 약물‧주류, 섹스, 잔혹한 이미지 등을 둘러싼 핀란드 정부의 검열 역사를 다룬다. 18세 이상 방문객만을 대상으로 해, 따로 열쇠를 받아 기기에 꽂았다. 우편함 모양의 박스를 들여다봤다. 그 안엔 정부의 영상이미지 검열과 해제 사건이 소개돼 있다. 핀란드는 2001년 섹스‧폭력 장면을 다루는 성인영화 검열을 해제했다. 현재 핀란드 헌법에 따르면 아동보호 목적으로만 시청각물 표현의 자유를 제재할 수 있다.

▲박물관 한가운데엔 핀란드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을 다룬 헬싱긴 사노맛 지면을 전시한 공간이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박물관 한가운데엔 핀란드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을 다룬 헬싱긴 사노맛 지면을 전시한 공간이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우편함 모양의 박스를 들여다봤다. 그 안엔 정부의 영상이미지 검열과 해제 사건이 소개돼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우편함 모양의 박스를 들여다봤다. 그 안엔 정부의 영상이미지 검열과 해제 사건이 소개돼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완전 언론자유국은 없다” 정치권력에서 혐오세력까지

세계 지도 위에 나라별 언론자유지수를 표현한 터치스크린도 주요 전시물이다. 국가를 택하면 해당 지표가 나온 이유와 관련 사건이 소개로 뜬다. 전시는 완전한 언론자유국은 없다고 강조한다. 3년 내리 언론자유 1위를 기록한 노르웨이를 택했더니 다음 글귀가 떴다. “물리 위협이 아니라도 어떤 저널리스트는 온라인 괴롭힘을 당한다. 2018년 12월 TV 진행자 프레드릭 솔방은 시청자들로부터 인종주의 코멘트를 받은 경험을 말했다. 코멘트는 그가 동양인으로 활발한 인터뷰를 펼치는 것과 관련 있었다. 그의 출신 배경은 한국이다.”

핀란드는 2016년 ‘러시아 추종 온라인 트롤’ 탐사보도로 언론 대상을 탄 여성 언론인이 이들의 표적이 돼 살해 위협에 시달린 사건으로 2017년부터 언론자유지수 2~4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을 선택하면 “한국은 최근 몇 년 간 언론자유가 크게 개선됐다”는 평이 뜬다. “정권이 바뀐 뒤 문재인 정부는 두 공영방송에 영향을 끼쳤던 갈등을 해결했다.”

박물관은 언론자유 추구 수단으로 전통 언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트위터 모양 버튼을 누르면 전세계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의 트윗 규모와 흐름이 언론자유 지도 위에 떠오른다. 핀란드 언론사의 한 편집장은 곁에 배치된 영상기기에서 “왜 트위터와 언론자유인지”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트위터는 터키와 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부가 가장 통제하려 노력하는 매체다. 2011년 아랍의 봄과 같이 언로를 통제 당한 이들이 기대는 수단으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매체이기도 하다.

▲빠이발레흐띠 박물관의 세계 언론자유지도(왼쪽 위, 아래)와 트위터 지도. 사진=김예리 기자
▲빠이발레흐띠 박물관의 세계 언론자유지도(왼쪽 위, 아래)와 트위터 지도. 사진=김예리 기자

“미디어박물관, 단지 전통매체 소장 넘어서야”

사일라 린나할메 박물관장은 이날 “박물관의 목표는 이제 단지 신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저널리즘은 그냥 미디어가 아니라 독자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이들과 관계 맺고 사회를 받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전통 신문 생산과정을 다루는 전시관도 있다. 박물관 지하엔 윤전기 일부를 포함한 신문 인쇄 장비들을 전시해놓았다. 그러나 2005년 핀란드 언론사 관련 전시물만 모아두는 형식을 버리고 방문객 또는 미디어 이용자와 소통하기를 택했다. 가이드 내용은 이용객에 따라 달라지고, 전시 주제도 박물관이나 웹사이트 방문객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한다. 이용료는 없다. 헬싱긴 사노맛 재단 부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박물관 전시에 대한 전권은 언론사 아닌 재단에 있다고 설명했다. 재단이 오히려 언론사 지분을 일부 소유하고 있어서다.

▲사일라 린나할메 빠이발레흐띠 박물관장 겸 헬싱긴 사노맛 재단 부이사장(왼쪽)과 빠이비 레흐또비르따 실무 프로듀서. 사진=김예리 기자
▲사일라 린나할메 빠이발레흐띠 박물관장 겸 헬싱긴 사노맛 재단 부이사장(왼쪽)과 빠이비 레흐또비르따 실무 프로듀서. 사진=김예리 기자

박물관은 언론인과 학술연구자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박물관 아카이브엔 4000m 길이에 해당하는 신문과 관련 사료, 기기들을 소장해 기자들이 방문 취재한다. 미디어 연구자도 자료를 열람한다. 박물관은 시민들이 기자를 만나는 자리도 수시로 마련한다. 특히 견학 온 10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자들 만나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현직 기자를 초빙해 자신의 직업과 언론 자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 재단의 박물관이 핀란드를 넘어 세계 각국의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다루는 이유는 뭘까. 린나할메 관장은 “핀란드는 ‘버블’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핀란드의 언론 자유도 언제든 영향을 받아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세계는 늘 미디어와 함께 바뀐다. 박물관은 한 언론의 뿌리만이 아니라 현재 미디어가 위치한 맥락과 현상을 담아내야 한다.”

※ 본 기사는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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