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이 있다. 독일의 문학비평가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이 남긴 ‘번역은 반역이다’(“Traduttore, traditore.”)라는 말을 조금 뒤집은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서양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시에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는 저자 박상익이 번역을 하면서 들었던 단상과 고민을 묶어 2006년 발간한 저서다. 책에서는 일찌감치 근대 번역이 시작된 타국과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고, 동시에 한국의 번역이 처한 상황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후진적인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동시에 저자는 양질의 번역이 각국의 학문에 큰 기틀로 작용했음을 언급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학문이 아닌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특히 대중문화의 번역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매체와 직결되는 분야다.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해당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박상익의 지적대로 한국의 고유한 대중문화의 기틀을 형성하는 행위다. 설령 그 작품 자체가 한국에서 창작된 것은 아니지만, 시민과 창작자들이 번역된 대중문화와 작품들을 접하며 발생하는 상호교류는 이후에 새롭게 형성될 문화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학술서적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매체에 대한 번역도 매우 소홀했다. 영화 영역의 오역은 매년 터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연례 행사가 되었다. 시청자들에게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역으로 유명할 배우 겸 번역가 조상구나 한때는 최고의 영상 번역가로 칭송받았던 이미도는 차츰 오역은 물론 일부 대사는 각본을 다시 쓰는 수준으로 번역하며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적이 있다. 2010년대 현재에도 2018년 개봉해 오역 논란이 일었던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번역자 박지훈 등 오역에 대한 논란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만화 영역에서도 번역가 박련, 오경화가 자주 오역 논란에 휘말리고 있으며 소설, 게임 등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하지만 최근 벌어지는 어떤 번역 논란은 이전의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어 더욱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문제가 된 게임은 일본 반다이남코 사의 ‘아이돌 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이하 밀리시타)이다. 본래 2005년 오락실용 아케이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출시된 ‘아이돌 마스터’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폭풍적인 인기를 얻어 ‘아이돌 육성 게임’의 새로운 효시가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인기를 얻은 ‘아이돌 마스터’ 시리즈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스마트폰으로도 게임을 내게 되었다. ‘밀리시타’는 그렇게 아이돌 마스터의 스마트폰용 외전 게임으로 나온 2017년 작품이며, 한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는 2019년 8월 동시 발매하게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출시 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홍보 문구 등에서 드러난 번역이었다. 일본어 원문에서는 ‘오빠’나 ‘유혹의 섹시 어필’, ‘여자아이답게’, ‘다이너마이트 바디’로 설명되어 있던 문구가 한국판 소개 문구에서는 각각 ‘프로듀서’, ‘고혹적인 매력발산’, ‘아이돌답게’, ‘멋진 맵시’로 번역되어 있었다. 게임이 한국에 발매되지 않았던 2년 동안 일본어로 게임을 즐기고 있던 게임의 열성적인 팬들은 이러한 번역 수정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캐릭터의 특성’을 모두 파괴하는 번역이라는 이유로 거센 항의를 시작했다.

▲'아이돌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 홈페이지 화면.
▲'아이돌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 홈페이지 화면.

해외 발매를 추진하던 반다이남코는 이러한 항의에 처음에는 홈페이지 번역만을 수정하고 게임 내 번역은 종전 공개되었던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가는 형식으로 지난 8월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 정식으로 발매를 마무리하였다. 이에 팬들은 재차 다시 강한 비난을 이어나갔다. 무수한 팬들은 지속적으로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요구했다. 원문에 ‘여자력’이라 적시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번역은 ‘우아한’으로 의역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 그대로 ‘여자력’이라 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세게 펼쳤다. 팬들의 비난은 SNS는 물론 반다이남코 사가 한국 게이머들을 위해 개설한 네이버 카페도 가득 채웠다. 물론 게이머 커뮤니티 ‘루리웹’이나 게이머를 비롯한 서브컬쳐 향유자들이 주로 활용-작성하는 사이트 ‘나무위키’ 등의 커뮤니티에도 해당 논란이 빼곡이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결국 반다이남코는 그 항의 대다수를 받아들여 지난 9월 초 ‘원문 그대로’ 번역을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다수의 팬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오빠’, ‘여자력’, ‘섹시함’이라는 표현은 ‘원문 그대로’라는 명목 아래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참으로 웃지 못할 일까지 발생했다. 게임에 등장하는 노래 제목 ‘瑠璃色金魚と花菖蒲’는 출시 당시에는 ‘남빛 금붕어와 붓꽃’으로 의역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정된 번역에서는 ‘유리색 금붕어로 꽃창포’로 수정되었다. 문제는 ‘유리색’이라는 단어이다. 일본어 ‘瑠璃色’는 한자를 그냥 읽으면 ‘유리색’이지만, 이는 ‘유리의 투명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색으로 유명한 광물 ‘청금석’(라피스 라줄리, Lapis Lazuli)의 색을 칭하는 용어이다. 애시당초 ‘유리색’은 그저 일본어 단어를 한국어 발음으로 그냥 읽은 것일 뿐, ‘유리색’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어색한 단어이다. 하지만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다수 팬들의 움직임은 오히려 거꾸로 오역을 만드는 셈이 되었고 SNS나 팬카페에서도 이에 대한 논란이 재차 점화되었다.

이러한 해프닝을 제외하더라도 다수의 팬들이 요구하는 ‘원문 그대로’라는 말은 얼마나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매우 오랫동안 영화나 만화의 오역 논란에 질린 이들에겐 이러한 요구가 무척이나 당연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박상익의 지적대로 번역은 단순히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넘어, 새로운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작업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견 뜻이 같아 보이는 단어에도 국가나 문화권마다 다른 맥락이 존재하며, 동시에 표현 매체나 시기 등에 따라 변화하는 맥락의 흐름이 있다. 그 맥락들을 고민하지 않은채 ‘원문 그대로’만을 중시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차원의 오역이나 사회적 문제를 낳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어투 번역의 문제’이다. 몇몇 이들이 번역가들의 ‘수준 낮은 외국어 실력’을 지적했지만, 어투에 대해서는 최근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번역의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분명 남녀 캐릭터 사이에 특별한 수직적인 관계가 존재 않은 일상적인 대화 구문에서도 한국어 번역에서는 유독 여성 캐릭터의 말은 존댓말로, 남성 캐릭터의 말은 반말로 처리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분명 두 캐릭터는 평등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번역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젠더 상하관계’를 대입하여 번역을 진행했고 씁쓸하게도 소수의 시민을 제외한 대다수의 향유자들은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기에 다른 오역 문제와 달리 어투 번역의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수면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구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바로 ‘밀리시타’의 번역 문제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게임 배급사가 아니라 향유자들이 먼저 ‘자신들이 즐기는 문화의 수직 관계를 그대로 반영해 달라’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몇몇 팬들은 자신들의 번역 수정 주장이 정당함을 말하기 위해서 ‘남성들이 주로 즐기는 게임에 다수 팬들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고 주장한다. 분명 ‘아이돌 마스터’ 시리즈는 2005년 처음 발매될 당시부터 남성 유저를 겨냥한 프로젝트였고, 이는 별도로 아이돌 마스터 시리즈에서 별도로 남성 아이돌을 육성하는 외전 게임이 등장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게임을 즐기는 대상을 ‘기존 젠더 구도에 익숙하고, 서브컬쳐에 오랫동안 잠식되어 있던 젠더 인식도 포용할 수 있는 남성 게이머’로만 제한할 수 있는가. ‘아이돌 마스터’는 출시 15년째에 가까운 오래된 게임 시리즈이고 처음 의도했던 바와 상관없이 여성 유저들도 절대 적지 않게 게임을 즐기고 있다. 게임의 일본어 원문이 철저히 게임의 전통적인 시각과 일본 서브컬쳐 향유자들의 일반적인 젠더 인식에 맞춘 표현을 사용하니, 이를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만이 정당한 번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은 채, 이미 한국의 많은 팬들은 여전히 ‘원문 그대로’만을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밀리시타’에서 처음 발생한 일만은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 투니버스가 유명한 로봇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극장판 ‘역습의 샤아’를 좀 더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샤아의 역습’으로 수정하여 소개하자 ‘왜 원문 그대로 옮기지 않느냐’는 비난이 거세게 제기되는 일이 있었다. 이외에도 서브컬쳐 향유자들 사이에서 ‘원문 그대로’에 대한 집착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벌어졌던 흐름이다. 어떤 의미로는 자신이 즐긴 방식 그대로가 아닌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외부에서 이를 이야기하고 접할 때, 이러한 접근을 거부하거나 방어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이제는 젠더의 문제까지 결합되었다 봐도 과언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일본 서브컬쳐에 대해 무조건적인 편견과 수입 금지로 대했던 역사가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폐쇄적 인식이 나온 맥락은 분명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는 절대 멈춰있지 않고, 이와 함께 대중문화에도 등장하는 시대와 조응하는 이들이 지속해서 접근하고 다시 교류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엔 없다. 이러한 접근에 대해서 모두 자신들이 즐긴 방식만을 말하며 빗장을 더욱 걸어 잠그는 태도는 지금 당장은 안온할 수 있어도, 결국 그 길은 장기적으로는 대중문화 전반을 침잠하는 길로 이끌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은 문화이다’라는 주장이 ‘게임은 우리들만을 위한 문화이다’라는 막다른 길로 빠지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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