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주요 뉴스 포털 메인에 ‘미국이 한국에 핵발전소 40기 중동 건설 사업 파격 제안’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걸렸다. 유력한 에너지업계 관계자와 회동 결과 지난 6월 로버트 맥팔레인 세계안보분석연구소 회장이 방한해 핵발전소 건설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단독’까지 달린 이 기사는 그날 포털 상위권에 위치했고, 증권가에선 이 기사 영향으로 원자력 주가가 급증했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보면 이상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미국이 중동에 핵발전소 40기 건설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는 게 주요 내용인데, 주어와 목적어가 애매하다.

미국 정부나 기업의 공식 제안이 아니다. 기사에 따르면 ‘백악관 최고위층의 시그널’에 따라 로버트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통’의 전언이 전부다. 로버트 회장을 직접 인터뷰한 것도 아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소식통’이 기사 출처의 전부다. 보수싱크탱크인 세계안보분석연구소(IAGS)가 에너지안보를 다루는 곳이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 없는 ‘전해들은 이야기’로 주가까지 들썩거리는 상황이 2020년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들이 제안했다는 사업 참여 내용도 불명확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핵발전소 건설에 원천기술을 가진 나라다. 자국 내 원천기술이 있는데 한국에 제안한 것이 단순 건설 용역인지, 한국형 핵발전소를 중동에 건설하겠다는 것인지 알수 없다. 기사에는 이런 설명 없이 UAE에 건설한 핵발전소 4기의 주계약 규모가 244억 달러(약 28조원)이었으니 40기면 2440억 달러라며 ‘한국을 100년간 먹여 살릴 기회’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기사가 보도 됐을까? 지난 2월과 7월 미국 하원 감독개혁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국 하원 감독개혁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가 대통령과 친분을 이용해 중동에 핵발전소를 판매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밝혔다. 내부 고발자 진술을 정리한 이 보고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30년지기 친구’ 톰 배럭 콜로니캐피털 회장이 핵무기 확산관련 규제 조치를 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동 특사 자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배럭은 2016년 대선 당시부터 중동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해왔고, 트럼프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도 맡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핵발전소를 팔려고 만들어진 IP3인터내셔널은 배럭과 초대 보좌관을 역임한 마이클 플린을 고문으로 끌어들였다. 플린은 2017년 초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됐다가 러시아 정부와 유착설로 24일 만에 경질됐다. IP3는 사우디 왕세자에게 1억 2천만 달러를 투자하면 핵발전소 건설 업체 지분의 10%를 준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IP3 임원들이 트럼프 사위에게 미국의 핵발전 업체 웨스팅하우스 매입계획까지 브리핑했다고 밝혔다.

▲ 톰 배럭(Tom Barrack) 콜로니 캐피털 대표(왼쪽)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
▲ 톰 배럭(Tom Barrack) 콜로니 캐피털 대표(왼쪽)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

이런 의혹은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핵발전소 건설엔 천문학적 비용이 들고 중동은 아직 재정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아 각종 로비스트와 브로커가 활약하기 좋은 무대다. 이번 국내 보도와 미하원 보고서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백악관 최고위층의 시그널’을 운운하는 이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듣고 쓴 기사로 주가가 들썩거리고 장밋빛 환상이 담긴 추측이 난무하는 우리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이런 이야기가 소위 사설 정보지에서 나왔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요 일간지에서 이런 기사를 봐야하는 게 참담하다. 언론 스스로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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