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26일 당시 집권 신한국당은 새벽에 몰래 등원해 단 10분만에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앞서 개악된 노동법안이 정부안으로 발표되자 연세대 류석춘 사회학과 교수는 1996년 12월4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노동계는 물론이고 경제정의실천연합과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도 미흡하다고 평가했는데.

이듬해 1997년 류석춘 교수는 세계일보에 ‘세계 시론’을, 동아일보엔 ‘발언대’를, 한국일보엔 ‘특별기고’ 형식으로 칼럼을 썼다. 류 교수는 1998년엔 경향신문 ‘정동칼럼’ 필자로도 활약하다가 그해 겨울엔 조선일보 ‘시론’ 필진을, 다시 세계일보 ‘시론’ 필진도 맡았다. 급기야 1999년 1월엔 문화일보 객원 논설위원까지 맡아 ‘포럼’의 고정필진이 됐다.

▲ 경향신문 1996년 12월4일자 22면.
▲ 경향신문 1996년 12월4일자 22면.

류 교수는 1999년 1월 문화일보 포럼에서 시민단체를 향해 “정부 돈 받지 말고 재정독립부터 꾀하라”고 일갈했다. 1999년 2월 칼럼에선 한국 사회를 ‘자유민주주의’가 맞는지 반문했다. 이 글에서 그는 ‘유교 자본주의’론을 펼친다.

앞서 류 교수는 1997년 6월에 창간된 계간 ‘전통과 현대’ 여름호에 쓴 ‘유교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논문에서 “박정희 시대 한국경제를 ‘유교 자본주의’”로 명명했다. 60·70년대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조선시대 선비들의 후예인 관료들이 기업과 정당하게 손 잡고 ‘유교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한국에 박정희식 유교 자본주의가 유지된 건 상대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가졌고, 생산적 효육적이어서, 국가가 ‘정당한 정경유착’에 상당한 정도로 국민적 동의를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류 교수는 1997년 6·10항쟁 10주년 기념 달리기 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인기 관리도 꽤 잘했다. 80년 광주 땐 공부에 매달려 연세대 우등생으로 미국으로 유학갔다가 이한열이 쓰러졌던 1987년 6월 미 일리노이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 연세대로 돌아왔던 그는 1997년 달리기 대회에서 “연세대의 자랑스런 민주 열사인 이한열의 아름답고 순수했던 삶을 기리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온 국민이 군부독재에 맞섰던 6월 항쟁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자는 뜻에서 이 행사에 기꺼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류 교수는 극우와 보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내내 중앙일간지에 얼굴을 내밀었다. 2000년대 들어 류 교수는 다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시론을 썼다.

2001년 6월 김대중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벌이자 류 교수는 조선일보 7월7일자 ‘시론’에서 부도덕한 언론 기업을 법대로 처리하라는 시민사회를 향해 ‘악령들의 문화혁명’이라고 비난했다. 여기서 류 교수는 언론사 세무조사 때문에 조중동 같은 정론지가 모두 표적 및 기획 사정으로 언론 본연의 기능이 존폐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불평했다. 류 교수는 “80여년의 역사를 지키며 언론자유를 수호한 조선과 동아의 독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보수집단의 들러리고, 기자들 월급도 제대로 못주고 세금 한 푼 내지 못한 신문을 읽으면 개혁의 첨병이 된다”고 힐난했다.

▲ 2017년 7월11일 오전 류석춘 혁신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한국당의 혁신을 위한 각오를 밝혔다. 사진=자유한국당 홈페이지
▲ 2017년 7월11일 오전 류석춘 혁신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한국당의 혁신을 위한 각오를 밝혔다. 사진=자유한국당 홈페이지

 

류 교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판하면 반통일 수구이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비판하면 통일을 앞당기는 개혁이 된다”며 반공 이데올르기에 편승해 김대중 정부와 시민사회를 비판했다. 류 교수는 “미당(서정주)을 부정하고 조선과 동아를 부정하고 서울대학을 부정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하고 삼성과 현대를 부정하는 악령들이 우리에게 남겨 줄 유산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칼럼을 마무리했다.

류 교수는 2001년 9월 같은 사회학자인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설화 사건 때도 동아일보에 칼럼을 실어 조선일보의 김 교수 왜곡에 덧칠을 해댔다.

당시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이 2001년 9월25일 국감장에서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한 시민단체 연수 프로그램에서 토론자로 나온 김동춘 교수가 언론운동 방향에 대해 ‘충격을 주는 것, 깡패 방식이 필요하다’, ‘전화로 분노를 표출하고 윤전기에 타격을 가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조선일보는 1면에 “윤전기에 타격 가하는 깡패 방식 언론운동 필요”라는 제목으로 정 의원 말을 빌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를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27일자 사설 ‘언론재단은 정권의 하수인인가’에서 “윤전기에 타격 가하는 깡패방식은 무법천지의 폭력테러다. 아무리 조폭식 세상이라지만 언론개혁을 깡패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지경에 이르면 이건 법이라는 것이 있는 정상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썼다.

류 교수는 2001년 9월29일자 동아일보 ‘시론’에 ‘깡패식 언론개혁이라니’라는 제목의 글을 써 김 교수가 이미 해명한 내용을 못들은 척 재차 공격하면서 연수 참석자들을 향해 “그동안 정부와 한통속이 돼 언론개혁의 목청을 높여온 집단”이라고 매도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간단하다. 김 교수는 이 워크숍에서 “과거엔 못된 신문사를 혼내주기 위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자는 과격한 주장도 통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런 식은 안 되며 항의전화 등으로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는 요지로 말했다. 정 의원은 워크숍 뒤 언론재단이 만든 연수보고서 요약본을 근거로 국감장에서 발언했다. 그 결과 김 교수의 말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타격하자고 선동한 걸로 둔갑했다.

최근 류 교수의 위안부 망언을 듣고 그의 ‘유교 자본주의’을 생각해봤다. 유교가 이 땅을 자본주의적 근대화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유교 자본주의다. 그런 그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에 유교 잔재를 몰아내고 자본주의 근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이영훈 교수류의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둘은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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