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요건 없이 통신자료를 무더기 수집하고, 무분별한 감청까지 용이했던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의 전부개정법률안이 제안됐다. 통비법은 2011년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4차례 이상 받았지만 아직 개정되지 않았다. 20대 국회 종료가 임박한 만큼 정부가 논의를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주민의원실(더불어민주당) 및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정보인권연구소, 진보넷,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 등은 18일 오후 국회에서 입법토론회를 열고 전부개정안 전문을 공개했다. 주최단체들이 8개월 간 토론한 결과로, 17조로 나열된 현행법이 7장 38조 구성으로 전면 개정됐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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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골자는 크게 4가지다. △‘통신제한조치(시민의 통신비밀 보호를 제한) 무제한 연장’ 금지 △실시간 위치추적 요건 강화 △‘기지국 수사’ 요건 강화 △패킷감청(인터넷회선감청) 요건 강화 등이다. 모두 2011~2018년 간 헌법재판소가 시민 기본권을 과도히 해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조항이다.

먼저 현행법엔 없는 기본권 보호 의무가 추가됐다. 법의 목적(1조)에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및 통신에 관한 개인정보자기결정권 보호”를 명시했다. 기본이념을 2조로 신설해 “통신 및 대화의 비밀과 자유 제한은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고 혐의와 무관한 피의자의 통신 비밀, 제3자의 통신·대화 비밀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도 넣었다.

기존 방식의 패킷감청은 금지된다. 패킷감청은 인터넷 통신망에서 정보 전송을 위한 전기신호 ‘패킷’을 확보한 후 재조합해 내용을 확인하는 감청이다. 엄격한 요건이 없는 현행법에선 수사기관이 불특정다수의 방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개정안은 감청 대상의 유형을 특정할 수 없고, 다른 감청 방식으로 감청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만 패킷 감청을 허용하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도록 정했다. 현행법의 ‘허가서’를 영장으로 바꿔 헌법상 영장주의를 명확히 했다.

영장주의는 개정안의 핵심이다. 적법절차의 통제 강화를 강조한 헌재 판단을 반영한 결과다. 개정안은 패킷감청 뿐 아니라 통신사 등 전기통신사업자의 가입자정보,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도 엄격한 요건에 따라 영장을 신청해 법원으로부터 발부받도록 정했다.

불명확한 단어는 모두 삭제했다. 현행법은 통신제한조치가 가능한 요건으로 ‘범죄 계획 의심’도 포함했지만 개정안은 이 문구를 뺐다. ‘증거 수집이 어려운 경우’란 표현도 “증거 수집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로 수정했다. 통신제한조치가 가능한 예외 사유였던 ‘범죄 예방’도 삭제됐다.

전기통신사업자의 ‘통신자료’라 불린 이용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아이디 등의 정보는 ‘가입자정보’로 변경됐다.

▲박주민의원실(더불어민주당) 및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정보인권연구소, 진보넷,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 등은 18일 오후 국회에서 입법토론회를 열고 통비법 전부개정안을 발표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박주민의원실(더불어민주당) 및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정보인권연구소, 진보넷,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 등은 18일 오후 국회에서 입법토론회를 열고 통비법 전부개정안을 발표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위치정보추적자료 및 기지국 통신자료의 제공(기지국 수사) 조항은 신설됐다. 위치정보 경우 감청이 가능한 대상 범죄보다 범위가 더 축소됐고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수집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때”라는 조건이 달렸다. 특히 실시간 위치추적은 “범인 체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경우”로 한정했다.

기지국 수사 조건도 위치정보추적자료 경우와 동일하다. 현행법에선 수사기관이 특정 기지국을 이용한 착·발신 번호와 시각, 통화시간 등을 법원의 허가서 한 장 만으로 얻을 수 있었다. 헌법소원 계기도 무분별한 자료 수집 때문이다.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당대표 선출 예비 경선 당시 선거인들에게 금품이 뿌려졌다는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이 관할 기지국으로부터 659명의 통신자료를 수집했는데 범죄와 무관한 기자의 통신내역까지 포함됐다. 피해 기자가 “통신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개인정보결정권을 침해당했다”고 헌법소원을 청구해 2018년 6월28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통신제한조치 무제한 연장도 불가능하다. 개정안은 통신제한조치 기간은 1달을 넘지 못하고 도중에 목적이 달성됐을 땐 즉시 조치를 끝내도록 정했다.

기본권을 침해당한 시민의 알 권리와 심사청구권이 대폭 강화됐다. 개정안은 통신제한조치가 종료된 즉시 모든 당사자에게 관련 사실을 통지하고, 부당하다 여겨질 경우 당사자는 3개월 내 법원에 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뒀다. 또 당사자가 기록의 열람·복사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입자정보, 통신사실확인자료, 위치정보추적자료 등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이 자료를 제공받은 즉시 자료의 내용 및 수사기관이 제공받은 사실 등을 당사자들에게 서면으로 통지하도록 했다.

발표를 밭은 이호중 서강대 로스쿨 교수는 “정보 주체에게 적절한 고지와 실질적으로 의견을 진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헌재의 판단이 있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수사기관의 조치가 취해지기 전 당사자가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하고, 이마저 안되면 사후통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대 국회는 내년 4월 임기가 만료되고 4월 중순부터 총선에 돌입하는 일정을 생각하면 올해 정기국회가 마지막 심의 기회”라며 “국회가 부실하게 논의를 진행할 여지가 있는 만큼 정부가 입법안을 빨리 공개해 시민사회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도 이미 늦은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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