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항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았다.”
“평소에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물건을 부쉈다. 그래서 나도 맞을까봐 너무 무서웠다.”
“이상한 짓 안 할게. 치킨만 먹고 TV만 보다 가자. 쉬러 가자고만 했다.”

지난 1월부터 3개월 동안 전국 131개 성폭력상담소 중 66개소의 강간피해 상담사례 분석 결과 1030명의 피해 사례 71.4%(735명)가 ‘직접적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 사례’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장애인 피해자는 73.9%(233명), 비장애인 미성년자 피해자는 76.4%(129명)였으며, 직접적 폭행·협박이 행사된 경우는 전체 상담 사례의 28.6%(295명)에 그쳤다.

오는 10월 정기국회에서 현행법상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간한 자를 처벌하는 강간죄(형법 제297조)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여성인권단체 208개로 결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촉구했다.

▲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들로 결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0월 정기국회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피해 당사자) 동의 여부'로 바꾸는 개정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들로 결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0월 정기국회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피해 당사자) 동의 여부'로 바꾸는 개정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최나은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는 강간(유사강간 포함) 사례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밝혔다. △의료인에 의한 성폭력, 고립된 상황에서의 성폭력 등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고 도움 받을 수 업는 상황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 △잠 든 사이, 술 또는 약물에 취한 상태를 이용하는 등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 등이다.

최 활동가는 “누군가는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 협박을 해석하는, 이른바 ‘최협의설’은 과거 일이라고, 법원 판례도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현재의 일”이라며 ”폭행 협박이 구성요건으로 있는 한 피해자는 얼마나 저항했는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왜 충분히 거절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는지 계속 증명해야만 하며, 수없이 많은 피해들은 피해로써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미래에도 존재하게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현혜순 한국여성상담센터 센터장은 “지난 7월 발표된 성폭력 무고죄 검찰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 고소 중에서 82.6%는 불기소처분으로 종료됐다. 성폭력 무고 고소로 검찰이 기소한 사건 중에서도 15.5%는 무죄가 선고됐다. 이것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성폭력 피해자를 상대로 한 무고죄 고소 사건 중에서 실제로 성폭력 무고로 밝혀진 사건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라며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의 성폭력 행위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여 무고 가해자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성폭력 가해자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명예훼손, 무고로 역고소를 하겠다는 위협을 더 수월하게 만드는 데 형법 조항이 악용되고 있음을 말한다”고 지적했다.

유엔(UN)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해 한국에 형법 297조를 개정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부재를 중심으로 (강간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도경은 한국여성의 전화 여성인권상담소 활동가는 “영국, 스웨덴, 독일, 캐나다, 미국 등의 여러 선진국들은 이미 이러한 국제적 기준에 따르고 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또는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으로 규정하여 폭행 및 협박 없는 성폭력 사례들을 처벌한다. 특히 스웨덴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까지 처벌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며 “지금까지 살펴본 국제법과 해외 입법례는 모두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폭행 및 협박이 없다고 하더라도 동의 없는 성적 침해가 범죄이며 국가는 이를 처벌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라 강조했다.

▲ 18일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기자회견에서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이 '제정연도', '정조에 관한 죄', '폭행·협박'이라 적힌 손팻말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18일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기자회견에서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이 '제정연도', '정조에 관한 죄', '폭행·협박'이라 적힌 손팻말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현재 국회에도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거나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하는 법안 등이 여럿 발의돼있다. 지난 ‘미투’(#MeToo) 국면 이후 해당 법안 발의 소식들이 주목 받았으나 실제 법안 처리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는 “작년 3월 홍철호 의원안을 시작으로 강창일 의원안, 백혜련 의원안, 천정배 의원안, 송희경 의원안, 김수민 의원안, 이정미 의원안, 나경원 의원안, 박인숙 의원안, 올해 6월 김철민 의원안이 발의됐다”고 일일이 언급한 뒤 “작년 하반기에는 이미 모든 정당에서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회는 더이상 논의를 미루지 말고,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날까지 총 4차례 국회에 의견서를 제출한 연대회의는 지난 7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 소속 의원들 사무실을 일일이 방문한 데 이어 최근 각 정당 대표들과 면담을 이어가고 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미디어오늘에 “앞선 정당 면담에서 ‘여러 입법안이 올라와 있어 오히려 국회에서 논의를 회피하기 좋은 여건이기도 하니 여성단체들이 기준을 제시해 달라’는 의견을 들었다”며 “형법 관련 개정을 위한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10월 중 개정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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