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일본 학생운동 세력들은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를 구성한다. 이른바 ‘전공투’다. 이들은 1년 전 프랑스로부터 시작해 전 유럽을 휩쓸었던 당시 뉴 레프트 운동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았다. 

이들은 낡고 불투명한 대학 운영 개선이란 학내 투쟁부터 시작했다. 학생들은 국세청이 밝혀낸 니혼 대학 22억엔 비자금 사건이 일어나자 회계장부 공개와 이사진 전원 퇴진을 요구했다. 일본의 30여개 대학이 학생들의 대학 점거 속에 1968년 겨울을 맞았다. 1969년엔 도쿄대로 불씨가 옮겨 붙었다. 학내 문제로 시작했던 싸움은 점차 격화돼 ‘대학 해체’라는 자기부정 단계로 치달았다. 와세다 대학 투쟁을 이끌었던 구레 토모후사는 “출세를 위해 학문을 하면 할수록 학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1969년 165개 대학을 점거한 전공투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했다. 이들은 일본 공산당마저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거부했다.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은 1970년대 들어 내분과 과격성에 등을 돌린 시민들의 외면 속에 급속히 붕괴했지만 일본 사회 곳곳에 많은 교훈을 남겼다. 

무라카히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들 학생운동 세력을 힐난했다. 그러나 하루키가 비난한 건 전공투가 아니라 전공투 세대들의 변절이다. 미 제국주의니 대학 해체, 혁명을 공공연히 외쳤던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복학하고 대기업에 취업해 불과 몇 년 전 스스로 외쳤던 구호와 정반대로 질주하는 그 꼴사나운 모습을 비판한 것이다. 와세다 투쟁을 이끌었던 구레 토모후사 역시 지금은 혐한적 칼럼을 쓰는 보수주의자가 됐다. 영원한 건 없다. 

이렇게 68운동은 일본과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모두 68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일본 신문노련은 10여년 전까지 임원진 대부분이 68운동 세대가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한일 언론인 교류와 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 신문노련은 1995년 한국을 찾아 한국의 언론노조와 공동으로 ‘해방 50년’을 주제로 2박3일간의 국제행사를 열었다. 당시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에 사과하면서 양국의 공동번영과 발전을 위해 양국 언론인들의 연대가 필수임을 강조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을 찾은 한국의 언론노조 간부들에게 일본 신문노련 임원들은 ‘1980년 광주’를 주제로 토론하면서 광주 진혼곡으로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들은 노래하는 한국의 언론인들에게 눈물로 화답했다. 

제국주의와 패전국, 미군정을 잇따라 겪으며 이상하게 비틀린 일본을 독일식 모델로 탈바꿈시킬 유일한 힘이 일본 신문노련 같은 깨어있는 민간단체에 있다. 아베의 독주를 보면서, 일본을 진정한 사과와 반성 속에 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올바로 세울 주체 역시 이들이다. 

조국 정국 때문에 잠시 묻혔지만 지금은 해방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한일 갈등 국면이다. 이즈음에 일본 신문노련과 언론노조가 연대를 모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지난 6일 일본 신문노련이 혐한보도 자제를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한 달 전 언론노조 성명에 화답했다. 양국 언론인들의 민간교류가 막힌 한일 관계를 뚫는 소통의 창구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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