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가 해방 직후 한중일 노동자연대 앞장
강제동원 피해자가 해방 직후 한중일 노동자연대 앞장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일본 하나오카 자유노조위원장 김일수 관련 증언 입수

해방 직후 일본 내에서 한중일 노동자들이 연대했으며 그 중심에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일문학을 전공한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는 1947년 설립한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에 참여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 이우봉이 쓴 증언록 ‘재일 1세가 증언한다’를 최근 차타니 주로크 전 일본 민족예술연구소장으로부터 입수했다. 이를 보면 김일수 하나오카 자유노조 위원장이 한중일 노동자 연대에 주요 역할을 했다. 일본 내 아키타현 오타테시 북부지역을 ‘하나오카’로 부르는데 이 지역 노동자들이 뭉친 노조가 하나오카 자유노조다. 

해방 전 하나오카 광산에서 한중일 노동자가 일제 회사에 저항하며 연대한 사실은 김 교수가 이미 알렸다. 이번에 확인한 내용은 해방 이후 상황이다. 이우봉 증언록을 보면 1947년 하나오카 자유노조 창립 당시 조선 노동자 30여명, 일본 노동자 100명 이상이 참가해 다수 일본 노동자의 지지를 받아 김일수씨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부위원장은 일본인, 서기장은 증언록을 낸 이우봉이 맡았다. 

▲ 1947년 설립한 일본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일수 위원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 1947년 설립한 일본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일수 위원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김 교수는 1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일본인 작가가 ‘하나오카사건 회고문(번역 김정훈 교수)’에 한국인이 중국인 유골발굴에 앞장서는 장면을 기록했는데 왜 그랬는지 연구자로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김일수 관련 내용을 지역신문(광주매일신문) 연재를 통해 밝히고 일본어로 논문을 써 일본 학술지에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향후 이우봉 증언록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필요한 일이다. 

하나오카 사건은 1944~45년 하나오카 광산에 끌려간 중국인 포로 986명 중 절반가량이 아사·혹사·사형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당시 김일수 위원장은 중국유족 대표를 맡았다. 

김 교수는 “420여명의 중국인 학살이 일어난 건 1945년, 미군이 이 사건 전범을 찾은 건 1945~46년이고 (김일수가 위원장이 된) 1947년에는 유골 발굴이 안됐다”며 “한중일 노동자들이 해방 이후 조선인을 해고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던 때라 노조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노동운동의 리더는 일본인 권익이나 중국인 권익도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1953년 당시 중국으로 유골송환 운동을 하는데 요시다 당시 자유당 정권이 철투구를 쓴 경관대를 투입해 방해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증언록에는 일본 관공서 대표를 설득해 단체교섭 결과 유골을 발굴했다는 내용도 나온다”고 말했다. 김일수 위원장은 1950년 양심적 작가 마쓰다 도키코가 중국인들과 조선·중국인 피해현장을 방문하고 중국인 피해자 유골 수습 때도 선두에 서 직접 안내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김일수 위원장이 1947년 위원장으로 뽑히는 것부터 나오고 1949년 본격적인 행적이 나온다”며 “1960년 초 월북을 해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일수 위원장은 경상도 출신으로 면 직원과 군인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와 자신의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심야에 (1942~1943년 추정)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 김일수 위원장은 달변가였으며 한중일 노동자들에게 신망이 높았다고 했다. 

▲ 지난 2002년 '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회'가 발행하고 '중국인강제연행을생각하는회'가 후원해 하드커버로 만들었지만 시판되지 못한 이우봉 증언록. 221쪽 분량이다.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 지난 2002년 '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회'가 발행하고 '중국인강제연행을생각하는회'가 후원해 하드커버로 만들었지만 시판되지 못한 이우봉 증언록. 221쪽 분량이다.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이우봉 증언록은 출판사 ‘재일 1세가 증언한다’가 2002년 만들었지만 시판되지 못해 현재 몇 부가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2000년대 초 당시에도 한일관계의 어두운 역사는 일본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며 “조선인이 리더를 담당했는데 일본에서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겠느냐”고 시판하지 못한 배경을 짚었다. 

최근 한일관계에도 시사점이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일관계를 외교나 정치 시점에서만 보느라 각종 행사가 취소되는 등 시민들 교류까지 차단되는 상태”라며 “해방 직후 한중일 노동자 계급의 연대가 있었고 조선인이 리더가 돼 피해 진상규명에 앞장섰다는 건 역사전쟁이라는 말이 나오는 지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풀뿌리 교류는 계속 진행해야 마땅하고 교류하면서 역사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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