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관통한 예술가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무수한 질곡으로 가득했던 한국의 역사를 꾸준히 4컷 만평 ‘고바우 영감’으로 그려냈던 만화가 김성환이 향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한 것이다. 아직 ‘표현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던 시절, 권위주의로 한국을 통제하던 무수한 독재 정권들은 ‘고바우 영감’을 눈엣가시처럼 바라보았다. 그러기에 ‘고바우 영감’ 역시 숱한 부침을 겪어야 했지만, 꾸준히 연재를 계속 이어나간 끝에 ‘고바우 영감’은 한국의 만평과 시사만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그 상징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6년에는 만화가로는 최초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개인 전시가 진행되었고, 2000년에는 ‘고바우 영감’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1년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재된 만화’라는 명목으로 기네스북에 등재가 되었다. 동시에 2001년에는 김성환 작가 본인이 자신의 사재를 출연하고, 한국 최초로 작가 개인을 헌정하기 위해 탄생한 만화부문 시상식인 ‘고바우만화상’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상은 2015년 이후로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다.) 2013년에는 김성환 작가 본인과 동아일보가 소장한 총 1만743매의 원화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재되고 강력한 대표성을 위한 시사만화에 걸맞은 예우들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다.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와 만화계는 ‘고바우 영감’을 기념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무엇’을 기념하고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고찰이 있었는지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존재한다. ‘고바우 영감’은 주로 ‘신랄한 풍자 표현’과 ‘표현의 자유’의 상징으로 이야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1955년에 발생한 ‘경무대 똥통 필화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이 점차 독재 일변도로 흐르던 시절, 당시 대통령 집무실을 칭하던 표현인 ‘경무대’를 ‘똥을 치우는 사람’도 권세를 지니고 있다며 표현한 ‘고바우 영감’의 1958년 연재분이 이승만 정권의 역린을 건드려 필화로 발전해 작가 본인이 곤욕을 치른 사건이다.

‘경무대 똥통 필화 사건’은 만화는 물론 미디어 전반의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지속적으로 소비되었고, 동시에 이미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고 있던 ‘고바우 영감’의 유명세를 역설적으로 키운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권 이후로도 ‘고바우 영감’은 종종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표현이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신문에 게재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러나 엄혹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고바우 영감’은 연재를 중단하지 않는 것은 물론, 최대한 가능한 수준에서 정권의 실정과 문제를 풍자하는 시도를 이어나가 한국 만평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꾸준히 인식되었다.

▲1958년 1월23일 '고바우 영감'.
▲1958년 1월23일 '고바우 영감'. 경무대 똥통 필화 사건 관련 만화. 

한국에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도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을 정면으로 돌파했던 ‘고바우 영감’의 역사는 분명 소중한 역사이다. 그러나 그 ‘소중함’에 대한 인식은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탄생한 ‘87년 체제’는 물론, 1990년대의 시대상 또한 넘지 못한다. 1990년대는 언론사를 쥐락펴락했던 사전검열이 사라지고, 무수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집권과 함께 ‘문민정부’ 시대가 비로소 출범한 시기였다. 동시에 한국 경제의 기록적인 성장과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이면, 그리고 ‘IMF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추락이 함께 공존하며 이전 시기 못지않은 격동으로 가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1950-1980년대를 거쳐왔던 ‘고바우 영감’은 1990년대 또한 관통해왔다. 그러나 ‘고바우 영감’을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대다수의 기록은 1980년대 이후를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김성환 작가의 타계를 알리는 보도자료에서도 ‘고바우 영감’의 활약상은 모두 1980년대 이전에 머물러있다. 물론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고바우 영감’ 외에도 경향신문의 故 김상택, 한겨레의 박재동 등 다른 만평들이 조금씩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상대적으로 ‘고바우 영감’의 영향력이 감소한 측면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바우 영감’이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 꾸준히 만평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강조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실한 접근이 아닐 수가 없는 대목이다.

그나마 한국애니메이션학회와 커뮤니케이션북스가 기획한 ‘만화웹툰작가평론선’을 통해 2018년에 출간된 미디어 연구자 방희경의 저서 ‘김성환’ 정도만이 본격적으로 민주화가 다가온 이후 ‘고바우 영감’의 행보를 매우 간략하게 짚을 따름이다. 방희경은 저서를 통해 1990년대 이후의 ‘고바우 영감’이 “민주화 이후 대중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과 억압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더욱 비대해진 자본 권력”은 물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회비판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모두 외면하고 간과했던 점을 그의 한계로 지적한다. 물론 동시에 방희경은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1996년 한국의 OECD 가입 등 ‘세계화’ 열풍을 ‘고바우 영감’이 다뤄냈음을 언급한다. 동시에 1999년에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진상이 드러나며 화제가 된 노근리 학살 사건을 소재로 다루며 꾸준히 풍자의 칼날을 멈추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방희경의 1990년대 이후 ‘고바우 영감’에 대한 언급은 곧 195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성환의 명암을 드러낸다. ‘경무대 똥통 필화 사건’처럼 그는 정치 권력을 풍자하는 것에는 분명 일가견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 성장과 함께 마구 세력을 키우던 경제 권력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접근이 많았던 측면도 있다. (김성환 작가의 유작이 일본 경제인들의 성공담을 다룬 ‘일본 거상기담’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1980-1990년대 이후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새롭게 제기된 대안적 가치와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이 부족했던 측면도 동시에 존재한다.

▲김성환 선생의 고바우영감.
▲김성환 선생의 고바우영감.

이러한 한계가 ‘고바우 영감’이 오랜 기간 축적한 역사성과 상징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1987년 체제가 성립된 이후 다시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한국 만평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결국 이러한 한계를 들여다 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방희경의 연구 정도를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이야기되는 ‘고바우 영감’은 언제나 1980년대 이전에 머물러 있다. 마치 ‘고바우 영감’이 1990년대에는 연재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1990년대의 ‘고바우 영감’은 매우 깨끗하게 증발되어 있다.

곧 2020년을 앞둔 지금 현재, 한국의 만평과 시사만화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과거의 신문에는 만평과 시사만화가 작지만 없으면 안 되는 필수 항목이었지만 이제는 서서히 비중을 줄이는 매체가 늘어나고 있다. 간혹 만평이 존재할지라도,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신랄함’으로 착각하는 작가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박순찬의 ‘장도리’ 정도가 높은 인기와 일정한 퀄리티를 꾸준하게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단행본을 발간할 따름이다.

동시에 일부 매체는 새롭게 등장하는 독자들을 영입하기 위한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권권규, 치삼 등 인터넷으로 화제를 모은 작가를 영입해 온라인 전용 만평을, 주간지 시사in은 전통적인 만평 작가인 김경수의 ‘시사터치’와 함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아 오프라인으로 진출한 작가 굽시니스트(김선웅)의 작품을 함께 연재하는 등의 시도를 펼쳐왔다. 주간지 한겨레21은 전통적인 형태의 만평을 그려오던 조남준의 만평 ‘시사SF’가 2004년 막을 내린 이후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을 비롯해 김보통, 마영신 등의 작가를 기용하여 시의적인 작품을 연재하는 시도로 만평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한국의 매체에서 만평과 시사만화가 지녀왔던 영역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로운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와도, 시사만화의 묘미는 그저 시사를 만화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망각하는 부실한 창작의 비중이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바우 영감’을 특정 시기만 특정한 형태로 기념하고 모습은 한국 시사만화와 함께 만화계 전반이 놓인 문제적인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낼 따름이다. 진정으로 ‘고바우 영감’을 기억하고 싶다면, ‘고바우 영감’이 지나온 모든 역사를 피하지 않고 들여다봐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시사만화를 함께 응시할 때, 비로소 ‘고바우 영감’은 박제된 역사를 넘어 지금 현재의 역사로 호흡할 수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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