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열심히 두들겨 맞고, 특히 지식인들로부터 상갓집 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는 엄청난 견제를 받고 있는데 그와 비슷한 언론은 견제받고 있지 않지요. 저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죠. … 일부 언론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더 당당하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월간중앙’ 2001년 3월호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인터뷰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러 의미에서 ‘유례가 없는’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의 삶은 ‘언론개혁’과 함께했다. 1991년 주간조선은 ‘호화요트’ 왜곡 보도로 당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노무현 의원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2001년 노무현 민주당 고문이 “언론사는 당연히 세무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자 사설에서 그를 비판한 뒤 한동안 신문지면에서 아예 ‘노무현’을 쓰지 않는 식으로 노골적인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다.

그럼에도 그는 언론사 세무조사 국면이던 2001년 6월 언론노조 강연 자리에서 “언론사주는 비리의 실체가 드러난 마당에 국민에게 사죄하고, 기자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돌려주든가 아니면 언론사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주류 언론의 노골적인 비판·비난에도 공개적으로 ‘언론개혁’을 주장한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기획해 펴낸 ‘노무현 정부의 실험-미완의 개혁’에서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언론 때문에 망했다”고 적었다. 이 교수는 이 문장의 의미를 두고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의사소통의 장을 축소 시키고 그곳에 잘못 접근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며 국민에게 개혁적 의제를 제시하고 시민사회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주요 정치적 경쟁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제3의 길을 의도했으나 일관된 메시지를 산출하지 못한 이유를 중심으로 노무현 정부의 소통적 무력함을 지적하고, 정부가 스스로 정치적 의사소통의 장을 축소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노무현식 말하기의 특성 △언론개혁 의제 설정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 △정부와 공직자의 언론사 소송이 민주주의에 갖는 함의를 언급하며 노무현정부는 임기 내내 “갈등의 해결자가 아닌 갈등의 당사자라는 해석적 틀(프레임)이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의 언론조정신청건수는 752건이다. 조선일보 79건, 동아일보 71건, 중앙일보 31건, 문화일보 56건 순이다. 같은 기간 한겨레는 30건, 경향신문은 28건을 기록했다. 이명박정부의 언론조정신청건수는 352건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특히 조중동과 소송전을 이어갔다. 노무현정부는 2003년 2월부터 2007년 4월까지 동아일보와 7건, 조선일보와 6건, 중앙일보와 3건의 소송을 진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친필 메모. ⓒ뉴스타파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친필 메모. ⓒ뉴스타파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은 총선개입 논란을 보도한 동아일보에 대해 반론보도 심판청구에 나섰고 결국 동아는 반론보도를 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8월 참여정부를 거짓말쟁이로 묘사한 조선일보 만평에 대해서도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정정보도 결정을 받아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6건의 정정·반론보도를 청구해 공무원 중 청구건수 1위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도 6건을 기록했다. 정부가 갈등의 당사자로서 ‘전면전’을 벌였던 흔적이다.

물론 이유가 있다. 지난 5월 뉴스타파가 공개한 노무현 대통령 친필 메모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2006년 메모에서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야당과 보수언론 등 당시 기득권 세력을 가리켜 “끝없이 위세를 과시한다. 모든 권위를 흔들고, 끝없이 신뢰를 파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놓고 막상 추진하면 흔든 것도 한둘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노무현 정부 첫해였던 2003년 조선·동아·한겨레 모두 대통령 관련 사설이 크게 증가했다. 부정적 사설이 긍정적 사설보다 많았다. 이준웅 교수는 노무현정부를 두고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언론의 평가적 담론의 대상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권은 역대 어떤 정권보다도 시민사회의 갈등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했건만 설득적 의사소통에 실패함으로써 갈등의 화신처럼 보이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일단 이런 프레임에 갇히고 나서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며 개혁적 진보 정권이 실패한 이유가 개혁 이념 때문이 아니라 방법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은 현재 문재인 정부에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권은 대통령의 담론적 권위를 비롯해 누구에게나 공공연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의사소통 체계에서 출범한 정권”이라고 분석하며 “어떤 사안이나 의제를 제시한다고 해도 주요 언론에 의해 이념화되고 분화된 이념 세력들 간 투쟁 차원에서 인식되며, 결국 사회 갈등의 한 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첫 번째 정권”이었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운구행렬. ⓒ노무현재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운구행렬. ⓒ노무현재단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나는 언론 권력과의 유착을 단절했다. 언론 권력의 부당한 특권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 자유를 탄압한 적은 결코 없었다.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정정 보도 청구를 하거나 법원에 민사 소송을 낸 것을 가지고 언론 탄압이라고 한 것은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엄살에 불과하다. 내가 대통령이던 5년 동안 대한민국 언론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자기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했다. 나는 다만, 언론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대통령이고자 했다”고 적었다. 

2007년 3월 작성된 대통령 메모에는 “식민지 독재 정치하에서 썩어빠진 언론”이란 대목이 등장했고, “대통령 이후. 책임 없는 언론과의 투쟁을 계속할 것”이란 대목이 비장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2007년 수석보좌관 회의 중 메모에는 “언론과의 숙명적인 대척”이란 대목도 등장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은 검찰의 망신주기 수사 속에 세상을 떠났다. 요즘 다시금 ‘논두렁 보도’가 입길에 오르내린다. 노무현정부에 이어 문재인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최근 ‘조국 사태’를 비롯해 주요 현안마다 주류 언론을 ‘문제의 원인’ 또는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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