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우 영감’ 등 시사만화계 대부로 불리는 김성환 선생이 8일 별세했다. 김 선생은 군사 정권 시절 시사만화로 벌금형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김 선생 장례는 ‘만화인장’으로 치러진다. 

김 선생은 193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6살에 만주로 이주했다. 1949년 해방 후 창간된 연합신문에 만화 ‘멍텅구리’로 데뷔했다. 이후 국방부 종군화가단 소속으로 국방부에서 발행한 승리일보의 부록 ‘주간 만화승리’, 대중잡지 ‘희망’, ‘신태양’에 만화를 연재했다. 

▲김성환 선생의 고바우영감.
▲김성환 선생의 고바우영감.

1955년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했다. 1980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이후 1992년 9월까지 조선일보,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문화일보에 연재했다. ‘고바우영감’은 총 1만4139회 연재돼 한국 최장수 연재 만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김 선생은 만화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1957년 야당 의원의 7·27 데모사건을 다룬 잡지만화로 벌금형을 받았다. 1958년 1월23일 ‘고바우 영감’의 ‘경무대 똥 치우기 만화’로도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경무대 똥 치우기 만화’로 서울시경 사찰과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경무대 똥 치우기 만화’는 이승만 정권 당시 “경무대는 똥 치우는 사람도 권력이 있다”고 풍자한 작품이다. 

이후 김 선생은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 2번, 검찰에 2번 끌려갔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검열로 인해 하루 네다섯 번 고쳐 그릴 때도 많았다. 

▲1958년 1월23일 '고바우 영감'.
▲1958년 1월23일 '고바우 영감'.

2000년 이후에 김 선생은 풍자만화보다 개인전이나 에세이 작업에 집중했다. 그의 유작은 ‘일본 거상기담’이다. 생전 동아대상, 소파상, 서울언론인클럽신문만화가상, 언론학회 언론상, 한국만화문화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김성환 화백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만평으로 한국사회를 관통한 한국 만화의 산증인”이라며 “‘고바우 영감’은 물론 시사만화에 관한 연구나 분석이 부족한 상황에서 김성환 화백을 통해 한국 시사만화의 흐름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움직임이 확산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윤태호 한국만화가협회장은 “김 선생은 한국만화의 큰 어른이었다. 특히 고바우 만화상을 통해 후배 만화가들을 격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라며 “고바우 영감을 더는 신문에서 볼 수 없을 때도 안타까웠다. 이제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더 아쉽다”고 전했다. 

김 선생 장례는 만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분당제생병원장례식장이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10시, 발인은 11일 오전 7시다. 장례위원장은 권영섭 한국원로만화가협회장이다. 장례위원으로는 윤태호 협회장 등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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