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안희정.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9일 아침 10시25분께, 대법원 1호 법정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54) 전 충남도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이날 안 전 지사의 피감독자 간음 등 혐의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원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과 위력 행사 여부를 모두 인정해 10가지 혐의 가운데 9가지를 유죄라 판단했다.

위력 이용한 성폭력 유죄 원심 인정하는 흐름 따른 판결

원심은 피해자 김지은씨 진술을 두고 “주요부분에서 일관성이 있고, 사건 당시 상황과 피고인 행위의 세부내용, 당시 피고인과 피해자의 상호 행동과 반응 등에 관해 구체적이며 직접 경험하지 않고선 진술하기 어려운 세부적이고 비정형적 사항까지 상세하기 묘사”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허위의 피해사실을 지어내 진술했다거나 피고인을 무고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있다고 볼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도 했다.

반면 안 전 지사 진술에 대해선 폭로 직후 ‘합의에 따른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고 밝히거나, 검찰 조사 때 피해자와 연인관계라 주장하다 법정에서 이를 뒤집은 점 등을 들어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원심은 또 안 전 지사의 위력 유무를 판단하며 “피고인의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다”고 밝혔다. 안 전 지사가 “(김씨는) 수행비서로서 권력적 상하관계에 있어 적극 저항하는 등 성적 자기결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하기 취약한 상태에 있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이를 이용해 간음행위에 나아갔다”며 “특히 그 과정에서 실제로 위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유형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다.

원심 재판부는 주로 피해자 김씨를 상대로 신문한 1심과 달리 피고인 신문을 거친 뒤 이같이 판결했다. “실제 위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없고, 피해자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10개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단한 1심을 뒤집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월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돼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월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돼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최근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혐의에 유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온 판결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대법원은 최근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대사의 위력을 이용한 부하직원 성폭력 사건 △연예기획사 매니저가 연예인 지망생을 위력으로 성추행한 사건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극단 단원들에게 위력으로 성폭력을 가한 사건 등에서 원심의 유죄 판단을 모두 인정했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일곱 달 간 수행비서인 김씨를 4차례 위력으로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한 차례 위력으로 추행하고, 5차례 강제 추행한 혐의도 받았다.

안희정공대위 “성인지감수성이 법리 전부인 듯 보도 않길”

선고 직후 김씨를 지원했던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등 관계자들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서로를 격려하며 눈물을 보였다. 이날 공대위에서 65명가량의 시민이 연대 의미로 선고를 방청했다. 공대위는 이날 11시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을 계기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이 지금 당장 끝나기를 바란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피해자 김지은씨 지원 변호인들과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 등이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 앞서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피해자 김지은씨 지원 변호인들과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 등이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 앞서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환영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환영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회견에 앞서 이들을 둘러싼 취재진을 향해 성인지 감수성만을 유일한 법리로 강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배복주 대표는 “법원 판단의 핵심은 김지은씨의 진술 자체가 워낙 일관되고 구체적이었고, 성폭력 피해자가 가지는 신빙성을 완벽히 갖췄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또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한 점도 중요하지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이기에 위력 부분이 강조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지은씨는 이날 대독을 통해 “진실이 권력과 거짓에 의해 묻혀 버리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날까 너무나도 무서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수많은 증거와 사실관계를 꼼꼼히 파악해준 재판부의 공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통해 진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2차 가해로 거리에 나뒹구는 온갖 거짓들을 정리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정말 돌아가고 싶다”며 “앞으로 세상 곳곳에서 숨죽여 살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분들의 곁에 서겠다”고 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환영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9일 대법원 정문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확정 선고 직후 환영 기자회견을 열었다. 배복주 전성협 대표는 이날 취재진에게 법원 판단의 핵심을 전해달라는 당부를 전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등도 환영 입장을 냈다. 정의당은 “오늘 판결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피해자다움은 가해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이정표를 세웠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과 민주평화당도 “대법원 판단을 존중하고 환영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민주노총은 “이제 일터 성폭력은 위력에 의한 범죄행위임이 이 사회 인식기반이 된 셈이다. 함께 해온 모든 여성 노동자도 당사자다. 미투 운동 시작에는 김지은씨가 있었다”고 했다. 안 전 지사가 속했던 더불어민주당은 낮 1시 현재까지 입장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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