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모두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미 제국주의에 맞섰던 조국해방전쟁으로 전승신화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17개국과 상대했으니 내용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한민국 역시 공산주의 위협을 막아낸 승전으로 자평한다. 실상은 승패를 가르지 못했고 자연스레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 즉 어느 쪽에 정당성이 있는지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어떤 의미에서 두 국가는 승리했다. 각 체제의 자존심을 걸고 국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정권에 충성하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비국민을 나눴고 국가폭력마저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국전쟁에서 양국이 승리했다면 패자는 전쟁이후 고착화한 냉전체제에서 희생당한 개인들이다. 주목받지 못한 개인을 살피기 위해 전쟁포로, 그중 빨치산 포로를 처음 다룬 연구가 나왔다.  

기자로도 활동한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원은 지난달 석사논문 ‘국민 만들기의 폭력적 동화-한국전쟁기 광주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에서 국가가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한 빨치산 포로를 국제협약으로 보호해야 할 전쟁포로와 어떻게 구분했고, 포로수용소 설립 당시 주민들의 토지강탈 사실 등을 밝혔다. 정 연구원은 이번 연구로 성공회대 2019 후기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전쟁 1년여쯤 흐르고 소위 ‘땅따먹기’로 승패가 갈리지 않을 분위기로 흐르자 양측은 정전협정을 시작했다. 포로 송환 문제는 정전협정이 길어진 요인이다. 초기 유엔군은 포로의 1:1 교환을 주장했다. 포로의 숫자가 자존심 대결이었다. 전쟁발발 이듬해인 1951년 10월까지 유엔군은 ‘빨치산 포로’를 따로 분류하지 않았다. 포로의 수를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 1952년 12월17일 백야전사령관 백선엽이 광주중앙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모습. 사진에는 '중앙포로수용소'라는 간판이 그대로 보이지만 증언에 따르면 1952년 6월 이전 중앙포로수용소는 '중앙수용소'로 이름을 변경한 상태였다. 사진=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 1952년 12월17일 백야전사령관 백선엽이 광주중앙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모습. 사진에는 '중앙포로수용소'라는 간판이 그대로 보이지만 증언에 따르면 1952년 6월 이전 중앙포로수용소는 '중앙수용소'로 이름을 변경한 상태였다. 사진=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정찬대 논문 재인용

 

하지만 유엔군 쪽 포로(약 15만)가 북한 쪽 포로(약 1만)월등히 많다고 판단하자 유엔군은 포로 의사에 따르는 자유송환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간인 억류자’를 따로 분류했다.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빨치산도 전쟁포로로 인정되지만 이들은 포로에서 배제당해 전향 작전의 대상이 됐다. 이제는 더 많은 포로를 ‘반공주의자’로 만드는 게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일이 됐다. 

북한은 유엔군 주장이 제네바협약에 맞지 않는다며 포로 전원을 즉시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오히려 유엔군은 전향한 포로를 이중간첩으로 쓰는 ‘실용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한 빨치산들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고 정 연구원은 지적했다. ‘민간인 억류자’는 약 5만명으로 추산한다.

연구에 따르면 빨치산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산악지대에서 활동한 좌익게릴라도 있지만 단순히 산으로 도망친 민간인들도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후방 토벌작전’이라며 일본군 출신이나 제주 4·3 등의 경험이 있는 지휘관들로 빨치산을 토벌했다. 한국전쟁이란 북한 인민군을 상대로 한 싸움인 동시에 ‘반공’을 강요해 국민동원 체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51년 6월에 설립한 것으로 추정하는 광주중앙포로수용소는 이 빨치산 포로를 가둬놓은 공간이었다. 후방 토벌 작전 중 잡혀왔기에 이곳의 감시는 삼엄했다고 한다. 구타와 고문이 있었고, 산속에 있을 때처럼 배고팠다고 했다. 동상으로 손발을 절단한 이들이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빨치산 포로 증언으로 광주중앙포로수용소 복원도를 만든 것도 이번 연구의 성과다.  

▲ 광주 중앙 제2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 있는 포로들의 모습. 아기를 등에 업은 부녀자들이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사료컬렉션
▲ 광주 중앙 제2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 있는 포로들의 모습. 아기를 등에 업은 부녀자들이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사료컬렉션

 

한편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 설립 당시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는 빨치산 포로를 수용하는 광주중앙포로수용소와 달리 전원 북한 정규군 출신의 ‘반공포로’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1952년 4월 설립했다. 제네바협약에 따라 처우를 보장했고, ‘반공포로’였기 때문에 수용환경도 더 나았다고 한다. 

정 연구원은 해당 수용소 인근 지역 원주민이 ‘자신의 토지도 군에게 징발당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해당 주민은 이 땅에 목화를 심었는데 군이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밭을 일굴 수 없었는데 보상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공포로’를 위해 국민의 토지를 빼앗는 아이러니가 전쟁 중 발생한 것이다. 

전쟁 때 군이 거주지를 빼앗는 경우는 더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이 인천 월미도를 폭격해 주민들이 대거 희생당했고 휴전 이후에도 군이 주거지에 주둔해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돌아가지 못했다. 

정 연구원은 연구를 통해 ‘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출신이라도 국군에 입대하거나 국군 출신이라도 인민군에 입대해 국군에게 총을 겨누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군 출신이라도 ‘반공포로’로 확인되면 한국에 정착해 한국 국민과 공존했고, 반공으로 전향하지 않는 이들은 감시받는 죄인이 됐다. 

정 연구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인민군이 된 사람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돼 또 다른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들”이 느낀 건 “적개심도 악감정도 아니었다”며 “나와는 무관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규정된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적’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누군가로부터 강요되고 규정되지 않았느냐”는 게 그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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