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부터 95년까지 집에서 나오면 저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경찰서·보안대·안기부 등 공식적으로 5명이 있었습니다. 트라우마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도 같이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그랬겠습니까. 술 먹고, 중독자가 되고, 자살하고, 가정이 파괴됩니다. 트라우마라는 말을 모를 때부터 ‘인권병원’ 만들자고 했습니다. 지금은 (만들어야)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정배 의원(무소속)이 3일 오전 국회에서 주최한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여는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법안 공청회’에서 김후식 5·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장이 한 말이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느끼는 트라우마는 다른 재난피해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역할을 하는 국가가 가해자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해자를 쉽게 처벌하지 못한다. 공동체 안에서 ‘빨갱이’, ‘폭도’ 등으로 낙인찍혀 고립되니 피해규모도 추산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국가가 나서 국가폭력을 예방하고 국가폭력 피해자를 치유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지난 4월말 광주광역시와 청와대·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국가보훈처 등 5개 기관은 ‘가해자인 국가가 과거사를 책임져야 하지만 트라우마센터 설립 등 근거법률이 없어 치유활동이 부족했고 대상자 다수가 고령이라 치유서비스 제공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모았다. 다만 현실적인 이유로 광주시가 운영하는 광주트라우마치유센터를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로 확대해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하다. 국가가 트라우마치유센터를 만들겠다는 대선공약을 국정과제에 반영했다. 문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지난 2017년 5·18기념식 후 관련 단체에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건립을 약속했다. 

지난 1월 행정안전부의 ‘국립 트라우마센터 설립 타당성 조사용역’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옛 국군광주병원 터 등 전국 5개 권역에 설치하는 방안이 나왔다. 2012년 세운 광주트라우마치유센터가 5·18 피해자 중심이었다면 이를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에 적용해 전국으로 확대하자는 방안이다. 

이에 천정배 의원(무소속)은 지난달 28일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고, 3일 오전 국회에서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여는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법안 공청회’를 열었다. 행안부 조사용역을 수행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날 발제에서 “국가는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본질은 폭력”이라며 “국가폭력의 범위는 일제강점기·미군정·권위주의 시기 뿐 아니라 현재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현재까지, 군·수용시설 피해자도 포함해야

조사용역 연구팀이 추산한 국가폭력 피해자는 사망자 기준으로 일제강점기부터는 97만5000여명,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46만5000여명이다. 40만명이 민간인 학살, 6만명이 군대에서 사망한 인원, 5000여명이 권력기관 등에 고문당했거나 형제복지원 등 수용시설 피해자다. 가족 등을 포함하면 약 730만명이다. 이 중 생존자를 180만명으로 추산했다.  

천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에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법’에서 정한 국가폭력 피해자를 대상자로 했지만 한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피해자들과 군에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 등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의 가족모임인 ‘함께’의 공복순 대표는 “한국전쟁 이후 군에서 사망한 사람만 6만명이고 다친 사람, 전역 후에 사망한 사람 등은 집계도 되지 않는다”며 “트라우마치유센터를 만들어서 국가가 전수조사 해달라”고 말했다. 

치유센터의 독립성·전문성 필요

전문가들은 트라우마치유센터가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명지원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정치권력이나 이데올로기 변화에 따라 방향이 흔들리면 치유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가 무너진다”며 “따라서 국립 트라우마치유센터는 반드시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명 센터장은 “치유를 진행해보니 사건 당시 충격도 있지만 이후 삶속에서 오는 트라우마가 훨씬 더 심했다”고 말했다. 

▲ 천정배 무소속 의원이 주최한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법안' 공청회가 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 천정배 무소속 의원이 주최한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법안' 공청회가 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트라우마치유센터를 건립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명 센터장은 “감시와 통제생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 삶이 자녀들에게도 전이되고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니 경제적인 어려움도 크다”며 “지금도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망언이 이어질 때 2차, 3차 트라우마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최현정 충북대 교수(심리학)는 “이 센터가 국가폭력을 예방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며 “국가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국가라는 생각이 있어야 회복도 있다”고 말했다. 

직접 규제를 할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막말 역시 논의할 부분이다. 한 교수는 “애써 치유하면 뭐하느냐. 전두환이 한마디 하면 도루묵 된다”며 “2차 가해를 막는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치유센터 하나 만들고 거기서 치유하라고 할 게 아니라 사회가 합의해 거대한 치유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년이면 5·18 민주화운동 40년인데 최근에서야 성폭력 문제를 한 피해자가 공론화했다. 최 교수는 “폭력의 피해자는 제일 힘없는 사람, 계급이 낮은 사람, 여성들”이라며 “자발적으로 피해자들이 오길 기대하면 안 되고, (센터) 추진과정에 여성활동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안부도 법안 취지엔 공감했다. 김갑용 행안부 사회통합지원과 과거사팀장은 “공감한다”면서도 “법적·제도적으로 접근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법안을 충실하게 검토해서 (방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며 “독일 트라우마 치유단체 등을 방문해 어떻게 운영하는지 시사점을 고민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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