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불화했던 최인훈(1936~2018)의 딸이 쓰고, 딸의 딸이 삽화를 그린 책 ‘회색인의 자장가’는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명준이 등장하는 ‘광장’을 쓴 작가 최인훈 가족의 내밀한 얘기를 담았다.

유명 작가의 딸로 살아야 했던 최윤경은 아버지 최인훈의 기대와 달리 “글 쓰는 일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일만 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윤경씨의 결심과 달리 그녀는 결국 아버지에 대한 글을 썼다. 윤경씨는 두 가지 원칙을 세우고 이 책을 썼다. “(아버지를) 왜곡해 신화를 만들지 말고, 재미있게 쓰자.” 이렇게 딸은 아버지의 1주기에 맞춰 책을 내놨다. 그리움을 가득 담아.

최인훈은 딸에게 자주 “어렵고 복잡한 얘기는 아빠가 많이 했으니까 윤경이는 나중에 즐겁고 재미있는 글만 쓰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영원한 ‘회색인’ 최인훈과 딸 이야기

윤경씨는 아버지 최인훈의 여든 두 해 삶을 딱 세 단어로 요약했다. ‘회색인, 크리스마스 캐럴, 화두’. 셋 다 최인훈의 작품 이름이다.

‘회색인’은 작가 최인훈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말이다. 좌와 우로 나뉜 싸움에서 양쪽 다 미쳐가는 걸 목도했던 25살 청년 작가는 1960년 ‘광장’을 통해 회색인 이명준의 삶을 그렸다. ‘광장’은 출간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탄탄한 서사 구조에 시대를 관통하는 담론으로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허위를 꾸짖는다. 

▲ 작가 최인훈의 딸 윤경씨가 쓴 ‘회색인의 자장가’.
▲ 작가 최인훈의 딸 윤경씨가 쓴 ‘회색인의 자장가’.

최인훈의 딸 윤경씨는 “나는 책읽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언제나 집엔 책 읽는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질렸다. 책 때문에 우리 가족은 TV뉴스 한 꼭지조차 신랄한 비평 없이는 보지 못했고, 책 때문에 보면 안 되는 드라마가 많았고, (어릴 적엔) 유치하다는 이유로 ‘뽀뽀뽀’ 시청을 금지당했고, 책 때문에 우리는 식탁에서도 늘 문학과 예술과 유토피아 얘기만 했다. 책 때문에 손발이 모두 묶여 버렸다”고 했다.

그렇다고 최인훈이 가부장적 아버지는 아니었다. 예술 한답시고 주색에 빠져 늘그막에 제이름에 먹칠 하는 여느 작가와는 근본이 달랐다. 최인훈은 누구보다도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는 대학에 나가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다했고 정년까지 마쳤다. 윤경씨는 평생 아버지가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딱 하나, 딸이 자신을 이어 작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은 컸다. 그러나 최인훈은 요즘 누구와 달리 욕망을 통제할 줄 알았다.

작가 딸을 바라는 욕망의 화신이었던 아버지

최인훈은 딸 윤경의 떡잎부터 알아봤다. 윤경씨는 초등 2학년 때 ‘바다’라는 짧은 시로 아버지의 상찬을 받았다. ‘바다야 바다야 / 너의 그 푸르고 넓은 옷은 누가 맞추어 주었니’. 최인훈의 소설 ‘광장’ 첫 대목이 바다로 시작하고, 최인훈의 마지막 책 제목이 ‘바다의 편지’ 될 줄 모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최인훈은 초등 3학년 딸 윤경을 데리고 서울 성북구 이태준의 생가를 방문했다. 이태준은 ‘한국의 모파상’으로 불릴 만큼 찬란한 단편을 썼지만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뒤 월북해 남쪽에선 잊혀진 작가였다. 최인훈은 딸에게 뼈아픈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윤경씨가 초등학교 때 살았던 서울 불광동 집 서재엔 겨울이면 신춘문예 원고가 쌓였다. 윤경씨는 몰래 원고를 가져다 읽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킨 윤경씨는 읽었던 모든 원고의 감상을 아버지에게 밝히고서야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왔다. 10살도 안 된 아이가 뭘 안다고.

▲ 작가 최인훈(왼쪽)과 딸 윤경씨. 사진=삼인 제공
▲ 작가 최인훈(왼쪽)과 딸 윤경씨. 사진=삼인 제공

최인훈은 딸에게 자상하면서도 한편으론 엄격했다. 고교 때 윤경씬 아버지에게 “옷이 참 예쁜 것 같아요”라고 했다가 호통을 들어야 했다. “좋으면 좋은 거지, ‘같은 건’ 뭐야?” 작가는 작가다.

부서져라 방문 닫고 돌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딸 윤경씨가 아버지와 가장 극적으로 대립한 건 1988년 중2 때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다. 윤경씬 크리스마스 이브를 친구들과 함께 보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친구네 가게 옥탑방에서 4~5명 단짝 친구들이 모여 놀았다. 어머니는 절반 허락을 하셨다. 그러나 윤경씨는 밤 11시쯤 아버지의 성화에 딸을 찾으러 온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에 와야 했다. 집에 온 윤경씬 부서져라 문을 닫고 방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골이 잔뜩 난 딸에게 말 대신 책을 건넸다. 자신이 쓴 ‘크리스마스 캐럴’을.

17살 여고생 때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한창 미쳐 있는 윤경씨에게 아버지는 “네가 입은 티셔츠에 쓰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최소한 제 옷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알고 입어야지”라고 했다. 윤경씨는 ‘아버지, 그것은 최소한이 아니라 너무나 최대한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예쁜 것 같아서 이 옷을 고른 것뿐입니다만’이라고 반박했지만, 그 말은 끝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딸을 지켜보는 최인훈 작가. 사진=삼인 제공
▲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딸을 지켜보는 최인훈 작가. 사진=삼인 제공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윤경씬 2018년 봄 마지막을 기다리는 아버지 병실에서 같은 경험을 한다. 최인훈은 외손녀 티셔츠에 새겨진 ‘etoile’란 글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자신 있게 “네 알아요, ‘별’이란 뜻이에요”라고 답하자, 최인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후로 윤경씨는 딸이 그 티를 입을 때마다 목부터 울음이 찬다.

찌질했던 ‘호밀밭의 파수꾼’, 되도록 문학과 멀리

윤경씨의 반항은 대학에서도 계속됐다. 윤경씨는 대학입시 때 “문학과 가장 먼 과를 고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비교도,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윤경씨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말았다. 문학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문과 중에서 가장 취직이 잘 되는 과를 골랐다. 그 때 아버지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딸이 대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미뤄뒀던 문학수업을 호되게 시작했다. 윤경씨의 대학 첫 방학 때 최인훈은 “이거 한번 읽어봐라”며 ‘호밀밭의 파수꾼’ 영문판을 줬다. 고난은 그렇게 시작됐다. 윤경씨는 그 때 ‘rye(호밀)’가 뭔지도 몰랐다. 윤경씨의 ‘호밀밭의 파수꾼’ 첫 독후감은 “찌질하다”가 다 였다. 책을 건넨 최인훈은 1시간도 안돼 딸에게 ‘다 읽었냐’고 다그쳤다. “재밌지?”, “네”, “어디가 재밌나?” 대학생 윤경씬 도통 재밌는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윤경씨는 나이가 들어 다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는 내내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었다. 홀든 콜필드가 문득 이명준과 겹쳤다”고 했다. 그러나 비극은 대물림된다. 윤경씨가 중학생 큰딸에게 이 책을 권했는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딸의 반응은 그 옛날 자기와 똑같았다. 윤경씨는 “너무 늦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사라진 뒤에야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며 죽은 아버지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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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

최인훈은 윤경씨가 고교 졸업 때까지 책 읽으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윤경씨가 영문학과 진학하자 최인훈은 시시각각 기회를 노렸다. 최인훈이 딸을 위해 준비한 리스트의 두 번째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윤경씬 아버지가 놓은 덫에 잡힌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이 책은 진심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사람 대신 그림이 늙어가는 이야기다. 청년인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와 이를 그리는 화가 바질, 작가의 사상적 자아인 헨리 워튼 경이 이야기를 엮어간다.

최인훈이 딸에게 권한 세 번째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었다. 15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이 소설집은 유년기에서 장년기까지를 아우르는 주인공들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각 편이 마무리된다.

친구의 누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소년과 가족 때문에 자신의 기회 앞에서 갈등하는 처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성공 앞에 동요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일관된 주제는 ‘마비’(paralysis)다.

‘더블린 사람들’은 ‘율리시즈’,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함께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이다. 당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사회를 통해 인간 사회의 본질을 그린다. 최인훈은 난해하기 이럴데 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중 가장 난이도가 낮아 이 책을 딸에게 권했을 것이다. 정작 최인훈은 ‘율리시즈’를 권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윤경씨는 아직도 ‘율리시즈’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더블린 사람들’은 ‘율리시즈’의 보다 일상적인 버전이다. T. S. 엘리엇도 “제일 먼저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라. 그것이 이 위대한 작가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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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최인훈은 딸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최인훈은 딸에게 수많은 책을 건넸다. 최인훈은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딸에게 주려고 애썼지만 딸은 “나는 나를 알았다. 내게는 아버지가 풀 수 없는 문제를 이어 받아 풀 역량이 없었다. 아버지는 너무 컸고 나는 너무 얕았다”고 했다.

1994년 윤경씨가 대학 2학년 때 최인훈은 자신의 후반기 최대 역작 ‘화두’를 썼다. 성인의 눈으로 소설 쓰는 아버지를 처음 목격한 윤경씨는 “나는 아버지에게 큰 제자가 되지 못했다. 문학은 나의 ‘화두’가 아니었다”고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늙어갔고, 딸은 대학을 나와 짧은 외국대사관 직원생활을 접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산후 우울증을 이겨내고 이젠 빈 둥지 증후군을 앓을 나이가 됐다. 늙은 아버지는 말년엔 작은 외손녀의 동시를 읽는 재미로 딸에게서 못 이룬 꿈을 대신 꿨다.

야망을 내려놓은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딸의 진로에 관한 한 야망의 화신이었던 최인훈은 딸이 아이를 낳자 야망을 내려놨다. 윤경씨는 그런 아버지를 “내가 자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조건적 사랑의 얼굴을 봤다”고 했다.

늙은 최인훈은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을 출발해 자기 덕에 책 읽는 취미를 가진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딸네 집까지 와 책장을 둘러보며 대견해 했다. “좋은 책들이 많구나. 윤경이는 머릿속이 잘 정리돼 있어서 나중에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다 내려 놓지는 못했다. 이렇게 최인훈은 딸 윤경씨가 글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속내를 오랫동안 비쳤지만 윤경씬 굳건히 버텼다.

윤경씨는 2018년 1월 말년의 아버지에게 “제일 좋다, 생각되는 책이 뭐예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좁은 문”이라고 했다. “동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거든.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버린다. 결국 사랑이란 건 그런 게 아닌가.” 윤경씨는 지금도 좁은 문을 열면 아버지가 서 있을까 생각한다.

윤경씨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추천도서’는 단편집 ‘웃음소리’다. 이 단편집엔 이명준의 어린 시절과 그의 누나가 나온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는 최인훈 희곡 특유의 시적인 지문이 가득하다.

아버지와 딸은 이렇게 수많은 책을 주고 받으며 갈등하고 사랑했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인 줄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다. 지금 장관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최인훈만큼 자식에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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