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나직한 음성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이재용-박근혜 정경유착에 대한 대법원 판단에 환호하고, 안도했다. 이날은 대법원의 권위를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전, 전직 대법원장 양승태는 ‘사법 농단’ 혐의로 구속되는 치욕을 자초했고 사법부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2015년 3월, 세 살짜리 딸은 엄마를 잃었다. 엄마는 KTX 해고 승무원이었다. 대법원판결로 1심과 2심에서의 승소판결이 뒤집혔고, 엄마는 항소심 판결 뒤 받았던 4년치 임금과 소송비용 8640만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 그 해 7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사례‘란 제목의 문건에는 “아이에게서 엄마를 빼앗아간” 판결이 협력사례에 있었다. 

‘공공부문 민영화와 관련한 여러 쟁점이 관계된 사안에서 결국 한국철도공사가 근로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인정함.’ 문건에 등장하는 이 건조한 대목 앞에 법조 기자 권석천은 이렇게 응수한다. ”그 아이의 아픔을 헤아리고 가슴 깊이 반성하는 것이 사법이 사법농단을 넘어서고, 공적 가치가 조직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만들기 위해 재판을 거래했던 초유의 사건은 어디에서부터 누구에 의해 출발했을까. 무엇보다, 이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중앙일보 법조팀장과 JTBC 보도국장을 거친 30년차 기자 권석천이 사법 농단을 추적한 결과물을 내놨다. 그는 신간 ‘두 얼굴의 법원’에서 사법농단의 줄기를 모두 기록해내며 ‘법조기자’의 원형을 보여줬다.
 
“공직사회가, 그리고 공적 가치를 지향하는 영역들이 모두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조직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도그마 속에서 조직의 존재 이유를 배신해왔다. … 내가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중대한 상황을 또다시 무관심과 진영논리의 휴지통에 욱여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쓴 이유다. 

▲'두 얼굴의 법원'/권석천 지음/창비/1만8000원
▲'두 얼굴의 법원'/권석천 지음/창비/1만8000원

‘조직 논리’. 돌이켜보면 조직 논리는 개인의 부조리한 행위를 쉽게 정당화한다. ‘사법농단’의 시작점이 된 이탄희 판사도 조직 논리 앞에 갈등했다. 2017년 2월, 국제인권법연구회 총무이사였던 이탄희 판사는 법원행정처 심의관 발령을 받았다. 승진 인사였다. 발령 인사 자리에서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이 판사에게 말했다.

“기조실 컴퓨터 보면 파일이 있을거에요. 그 비밀번호를 이 판사님이 어차피 다 풀 거 아니에요? 그러면 거기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들이 나올텐데, 그러더라도 놀라지 말고.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후 이탄희 판사에겐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위한 지시가 내려왔다. 

“기조실에 있는 뒷조사 파일을 내가 관리하게 된다는 건데 이제 내 일이 됐으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때부터 그 고민을 했던 거죠.” 그렇게 그는 첫 번째 사표를 냈다. 그의 사표가 경향신문 기사로 알려지며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사법농단’이 궁금했지만 사건의 줄기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시민들과 기자들에게 유용하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양승태 대법원장의 구속과 현재 공판 상황에 이르기까지 사법부를 둘러싼 주요 사건이 이탄희 전 판사와 익명의 판사들과 사법부 관계자들의 증언과 함께 소설처럼 등장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대법원은 최고 재판기관 자리를 다투는 헌법재판소와의 경쟁에서 질 수 없었다. 상고법원 설치는 대법원장 ‘치적 만들기’ 성격이 강했다. 양승태·박병대·임종헌 ‘트리오’는 상고법원 법안을 성공적으로 발주했다. 2014년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상고법원 법안을 발의했다. 2016년 19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법안이 폐기되며 상고법원 시나리오는 허무하게 끝났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의 상처는 컸다. 전·현직 고위 법관들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강제 징용 재상고 사건 문건 작성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재판 개입 △인사 불이익 통한 내부 비판·재판 독립 억압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시도 등등이 죄명으로 등장했다. 2015년 11월 법원행정처 차장이 작성한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법농단 사태를 법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대목도 짚는다. 법원은 내부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채 표류했다. 전국 법원장들은 ”사법부가 직접 형사고발이나 수사의뢰 등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회의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대법관들은 ’대법관 일동‘ 이름으로 재판거래 의혹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과거 청산은 검찰수사로 한정됐다. ”진상규명이 자신의 권한이자 책임인데도 (김명수 대법원장이) ’나는 전권을 위임하고 객관성과 중립을 지키겠다‘는 소신을 지킨 결과였다. 김명수의 소신은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과 ’정상적 권한‘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 아닐까.“ 법원을 ’가족‘으로 인식하는 이상, 누가 대법원장으로 오더라도 ’적폐‘는 도려낼 수 없다. 

비단 법원뿐일까. 저자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에서 드러난 검찰의 반인권적 조직 논리-‘검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서 드러난 국정원의 조직적인 수사 방해에 담긴 조직 논리 등을 언급하며 이렇게 적었다. “존재 이유를 잊은 조직은 흉기보다 위험하다. 존재 이유 때문에 받게 된 권한을 자신들을 위해 휘두르면 그 피해는 무고한 시민들이 입는다.” 비단 검찰과 국정원뿐일까.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탄희 전 판사. ⓒJTBC 보도화면
▲이탄희 전 판사. ⓒJTBC 보도화면

“이탄희의 사표는 우리에게 행운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재판받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사법부는 ‘법관의 직권남용 혐의’를 처음으로 마주하고 있다. 사법부는 달라질 수 있을까. 권석천은 “관련자 몇몇의 처벌을 판단하는 형사 법정의 좁은 틀에 사법 농단의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시민들을 향해 “여러분이 관심을 가질 때 법원의 변화가 시작된다. 법원이 달라지면 그 변화는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자유 평등 정의가 대법원 장식벽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작동할 때 일상은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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