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54)가 지난 23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사죄했다. 39년만의 일이다. 광주학살의 핵심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의 직계가족이 5·18 묘역을 방문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전·노 일가 중에 처음 5·18 묘역을 방문한 이는 재헌씨 어머니 김옥숙씨(84)다. 김씨는 1988년 2월25일 남편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직후 5·18 묘역을 방문해 참배했다. 

이번 방문에서 재헌씨는 방명록에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고 적었다. 

재헌씨는 묘역에 1시간 가량 머물며 윤상원, 박관현 열사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기렸다. 그가 머문 두 묘비 아래 누운 이들은 각별한 사람이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8월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 묘소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사진=국립 5·18민주묘지 사무소 제공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8월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 묘소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사진=국립 5·18민주묘지 사무소 제공

 

박관현은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계엄이 확대되자 광주를 빠져나와 여수로 피했다. 1982년 체포된 박관현은 ‘80년 광주’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옥중에서 50일간 단식 끝에 숨졌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으로 졸업 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은행원이 됐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서 일하던 그는 잘 나가는 은행원 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강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광주항쟁 때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다. 그는 진압 전날인 5월26일 아침 외신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회견에 참여했던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자신의 책에서 윤상원을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내게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브래들리 기자의 말대로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무력진압할 때 그는 끝까지 남아 도청에서 서른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윤상원을 세상에 알린 건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호다. 박노해는 이 책에 ‘광주 무장봉기의 지도자 윤상원 평전’이란 제목으로 그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박노해는 그를 ‘만 9년동안 썩어 묻혀진 80년대의 새벽별, 윤상원 열사의 혁명적 복권’이란 부제를 달아 윤상원의 짧은 일대기를 재조명했다. 당시 노동해방문학은 5·18을 파리코뮌을 닮은 ‘광주코뮌’으로 해석했다. 

▲ 윤상원(尹祥源) 열사
▲ 윤상원(尹祥源) 열사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집필에 참가한 ‘우리사상’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기관지라고 우겼지만, 우리사상은 사노맹 회원 대부분이 잡힌 뒤 사노맹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이 고작 두어 번 쯤 낸 이론서에 불과하다. ‘노동해방문학’이 사노맹의 기관지다. 

조국 후보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는 “연대의 가치를 부르짖던 이타적 386은 다 어디로 갔냐”는 국민들의 볼멘소리에 직면했다. 이를 두고 중앙일보는 지난 24일자 기사에서 386들을 향해 “권력의 사다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당하는 한국형 위계 구조의 최대 희생자 집단인 여성과 비정규직을 386세대가 대표하지 못한다면 이들이 산업화세대의 정치권력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다. 보수언론으로부터 질책 당하는 수준까지 추락한 꼰대 진보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386이 모두 조 후보 같은 건 아니다. 정치권력 앞으로 달려간 386만 있는 게 아니다. 더 많은 386이 여전히 비정규직 돌봄노동자와 청소노동자의 떼인 임금과 노동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새로 생긴 플랫폼 노동의 문제점도 그들의 노력으로 세상이 드러났다. 그들은 30년 넘게 예전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 불평등 구조를 부수는 힘겨운 바위치기를 계속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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