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이 범죄와 사회갈등으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미디어의 혐오표현 확산에 대한 가이드라인 마련 필요성이 제기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를 열고 ‘혐오표현 경험과 인식조사’(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민인식조사에 참여한 응답자 중에서 약 절반인 49.1%는 언론이 혐오표현을 조장하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고 답했다.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응답은 11.3%로 부정적 역할을 한다는 응답의 4분의1에 그쳤다. 언론이 조장하는 심각한 혐오 유형은 출신 지역 혐오라는 응답이 50.9%로 가장 많았고, 여성혐오(38.0%), 이주민 혐오(32.3%), 성소수자 혐오(24.8%) 순으로 나타났다. 인권위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한 국민인식조사는 지난 3월20~22일 성인 1200명 대상 모바일 설문조사로 진행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8%p다.

혐오표현 방치 우려는 절대적으로 높았다. 향후 범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응답자는 81.8%, 사회갈등이 더 심해질 것(78.4%)이라거나 차별현상이 고착화될 것(71.4%)이라는 응답도 70%를 넘겼다. 62.8%는 사회적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가 더 위축될 것이라고 봤으며, 자연적으로 혐오차별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응답자는 22.2%에 불과했다.

▲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주최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주최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필요한 혐오표현 대응정책으로 약 10명 중 9명이 ‘언론의 혐오 조장 보도 자제’(87.2%)를 선택했다는 점은 언론이 혐오표현을 촉발시킬 수도 있지만 이를 시정하는 중추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강문민서 인권위 혐오차별대응기획단장(차별시정국장)은 “2018년 혐오표현 예방·가이드라인 마련 실태조사에서 언론사 기자(44명)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63.6%가 혐오표현 관련 교육훈련 기회가 없었다고 응답한 반면, 기회가 있었다는 응답은 13.6%에 그쳤다”며 “혐오표현에 대한 언론인 인식 제고가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언론이 혐오를 혐오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혐오기사가 쏟아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정치인의 주장을 ‘혐오 발언’이라는 지적 없이 ‘따옴표’로 전함으로써 사실상 발화자와 같은 행위를 하거나 위력만 키워주는 사례는 일상적이다. 사건 등을 보도하며 혐오를 조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까운 예로 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됐던 방송인 하일씨를 두고 사안과 연관 없는 성소수자성을 언급하거나, 인천·서울 일부 지역 ‘붉은 수돗물 사태’에 근거 없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테러 가능성’을 운운하는 보도 행태 등이다.

▲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주최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주최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가 진행됐다. 사진=노지민 기자

김 처장은 기존 인권보도준칙의 개정·보완 필요성과 함께 유튜브·페이스북·네이버 등 플랫폼이 적극적으로 혐오표현 대응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허위조작정보에 기인한 혐오표현이든 사실에 근거를 둔 혐오표현이든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수준이 됐다”면서도 “다만 정부기관의 언론 규제는 언론탄압으로 악용될 수 있으며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옥죌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네이버·다음 등 포털 업체는 '뉴스제휴평가위원회'를 통해 혐오표현성 보도에 벌점을 부과해 언론사들이 자정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겨레 기자인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은 “혐오표현 가이드라인 제정에 대한 언론 내부의 부정적 인식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언론의 자유로운 보도가 우선이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는데 가이드라인 제정으로 자칫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보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전한 뒤 “그러나 자체 ‘게이트 키핑’에는 기자 또는 데스크의 독선적 주관이 개입될 수 있는 등 한계가 있다. 가이드라인을 제정해야 언론의 혐오표현을 제도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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