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3일 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군 원로와 참전용사 등으로 구성한 ‘전쟁기념관사업회’ 창립멤버 159명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2월4일자 경향신문 기사 ‘“대선배님” 깍듯이 예우’를 보면 노 대통령은 6·25를 회고하며 전쟁기념관 건립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이날 만찬에는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군인으로 활동하다 해방 이후 한국군 주축으로 활동했던 이들로 이형근과 정일권은 일본 육사, 백선엽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정일권은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외무부장관 등을 맡고,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백선엽은 항일유격대에 맞서는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유명하다. 

처음 전쟁기념관을 추진하던 이들은 ‘승전기념관’, ‘전승기념관’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질 뻔한 전쟁을 외세의 도움으로 비긴 전쟁, 실제론 남북이 서로 수많은 희생자만 남겨 둘 다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는 한국전쟁을 왜 승리했다고 왜곡·미화하려 했을까. 

▲ 1994년 완공되어 9000여 점의 전쟁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는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의 모습. 사진=박소영 대학생 기자
▲ 1994년 완공되어 9000여 점의 전쟁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는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의 모습. ⓒ박소영 대학생 기자

전쟁에서 이기면 많은 인권침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최근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태평양전쟁 피해자 배상을 두고 한일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베 정권의 호전적 인식에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이기면 해결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며 승리를 꿈꾸게 한다. 그런 점에서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양국 시민들이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들 관점에서 전쟁과 식민 지배를 기억하려는 건 평화를 위한 길이다.  

반면 전쟁의 주체인 정권은 승전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전쟁기념사업회법을 만든 1988년은 비록 정권을 연장했지만 민주화 열망에 떠밀려 헌법까지 바꾼 군부가 크게 위기를 느끼던 시기다. 그 결과 노태우정권은 육군본부가 있던 용산에 전쟁기념관을 지어 자신들의 이념기반인 반공의식을 다잡기로 한 것이다. 1989년 2월3일 노태우 대통령과 전쟁기념사업회 창립멤버의 만찬 자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원혁 전쟁기념사업회 연구원은 1994년 7월 쓴 “전쟁기념관은 왜 필요한가”에서 “‘전쟁’이란 말을 싫어하고 ‘기념’이란 단어에 시비 거는 사람들의 순수한 주장 이면에는 심각하고 무서운 파멸의 늪이 마약처럼 도사린다”며 “지성인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북침설에 장단을 맞추는가하면 민족의 전범인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추종하는 젊은이들이 없어지지 않고 설쳐댄다”고 했다. 전쟁기념관에 찬성하는 ‘반공’세력이 아니면 ‘친김일성’으로 몰던 색깔론으로 전쟁기념관 건립반대 여론을 공격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들에게 힘을 보탰다. 매일경제 보도를 보면 1990년 4월2일 청와대 비서실 직원들이 931만원을 모아 기념관과 기념탑 건립에 일조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쟁의 희생자가 아닌, 전쟁의 책임자들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쓴 ‘기억과 전쟁’을 보면 국가나 전쟁기억의 주체들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전사자의 희생을 부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분석했다. 같은해 9월28일 노 대통령은 전쟁기념관 기공식에서 “우리 현대사를 재조명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참된 역사를 깨우치는 게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덧씌웠다. 

▲  동아일보 1992년 6월25일 자 '모습 드러내는 전쟁 기념관' 지면으로 전쟁기념관 홍보실에 전시되어 있다. =박소영 대학생 기자
▲ 동아일보 1992년 6월25일 자 '모습 드러내는 전쟁 기념관' 지면으로 전쟁기념관 홍보실에 전시되어 있다. ⓒ박소영 대학생 기자

노태우 정권 이후에도 전쟁기념관 건립에 부정적인 여론은 적지 않았다.  

1993년 6월8일 동아일보는 ‘횡설수설’이란 코너에서 “이처럼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우리 역사상 치욕의 한 부분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서울 한복판에 세울 필요가 있을까. 세계 어느 나라도 내전의 현장에 조촐한 상징탑을 마련하는 것 외에 이처럼 거창한 기념관을 건립한 곳은 별로 없다”며 “착공 당시 별다른 여론수렴도 없었던 터라 뒤늦게 논란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3년 6월11일 조선일보는 ‘만물상’ 칼럼에서 “전쟁기념관 세울 수 있는 돈으로 전국에 적어도 10개의 어린이 과학관을 만들 수 있다”며 “무엇이 더 소중한가 따져보겠다는 사람도 정부 안에는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달 뒤인 7월9일 한겨레는 한국사회사연구회 등 역사관계 9개 학회가 공동성명을 내고 전쟁기념관 건설계획 중지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남북 화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건설계획을 중지하고 해당 건물 활용방안은 여론에 따라 다시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여당은 여론을 살폈다. 같은해 6월 민주자유당이 전쟁기념관을 ‘민족기념관’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전쟁기념관 명칭이라도 바꾸자는 논의가 나왔다. 1993년 10월30일 명칭변경 공청회에선 ‘전사박물관’, ‘군사역사박물관’이 대안 의견으로 나왔고, 1994년 6월17일 동아일보는 전쟁기념관 대신 ‘호국기념관’을 제안하는 독자 의견을 지면에 실었다. 그렇지만 1994년 6월10일 ‘전쟁기념관’이 개관했다. 

전쟁기념관은 군인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지운 채 반공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홈페이지에 여전히 전쟁기념관을 “우리 모두가 상무정신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우고 느끼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관련기사 : 전쟁을 ‘기념’해도 되는 것일까]

※ 참고문헌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억과 전쟁
이원혁, 전쟁기념관은 왜 필요한가
진용주, 6월 전쟁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한홍구, 전쟁을 기념하는 곳에 평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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