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위안부기림의날을 맞아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에 위안부 기림비가 제막된다. 위안부 피해를 첫 공개한 고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중국·필리핀 소녀 3명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남산은 일본 식민지배의 상징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남산에 주군했고 이후 일제 강점기 때도 일본의 조선주둔군사령부가 남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그곳이 용산기지가 됐고, 이후 일본인 집단 거주촌도 남산을 끼고 들어섰다. 동부이촌동과 신당동 문화촌이 그랬다. 

1925년 남산엔 조선신궁이 들어섰다. 일제는 신궁 근처 작은 역에 불과했던 남대문역을 경성역으로 키워 지금의 서울역이 됐다. 신당동 아래 동대문운동장도 일제의 작품이었다. 남산은 원래 남대문에서 이어지는 조선 성벽이 둘레 쳤던 곳인데 이를 허물고 20만평의 신궁을 지었으니 조선침략의 상징이 될만했다. 

1937년 6월8일 충청북도 옥천 공립보통학교 6학년 수학여행단에 함께한 12살의 고 육영수 여사도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신사참배했다. (박목월의 ‘육영수 여사’)

요즘 초중고등학교 수학여행에 꼭 에버랜드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일제 때 조선신궁은 시골 학생들 수학여행 때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남산은 한국방송사에도 남다른 곳이다. KBS 1TV가 첫 전파를 쏜 게 남산 자락에서였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 실세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재경 공보부장관을 불러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을 지시했다. 국민소득 80달러의 최빈국에 방송 기자재 살 돈은 없었다. 그러나 김종필은 오재경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한국은행 지하실 창고에 간첩 황태성에게 압수한 돈 20만 달러가 있는데 그걸 다 주겠다고 했다. 5·16쿠데타 직후 북한은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와 친했던 황태성을 서울에 밀파했다. 박 정권은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황태성의 서울 잠입을 눈치채자 그를 사형시켜 버린 뒤 그가 남긴 돈을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에 썼다. 이렇게 6개월만에 급조해 만든 KBS 1TV는 1961년 12월31일 저녁 7시 임택근 아나운서의 생방송 진행으로 첫 전파를 쐈다. 임 아나운서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KBS 텔레비전 방송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임 아나운서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가 갑자기 정전이 돼 사방이 깜깜해졌다. 급조한 시설은 생방송을 견디지 못했다. 

사실 우리나라엔 1956년 첫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다. 미국 전자업체 한국지사가 하루 2시간씩 텔레비전 방송을 하다가 경영난에 1년 뒤 허가권을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에게 넘겼다. 장 사장도 대한방송주식회사를 만들어 하루 몇시간씩 텔레비전 방송을 했지만 1959년 2월 화재로 방송시설이 모두 불탔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장 사장의 채널을 회수해 KBS 1TV를 개국했다.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 군복 입은채로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에 그토록 매달렸던 건 방송을 통한 이미지 정치 때문이었다.

이렇게 남산은 100년 넘게 고난의 연속이었다. 해방 뒤엔 살아있는 우상이었던 이승만 동산이 남산이 들어섰고 그 동상은 4·19 혁명 때 철거됐다. 남산엔 1959년 안중근 동상, 1969년 백범 동상이 들어섰다. 

일제 때부터 권력자가 공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상징을 세웠던 남산에 이번엔 전혀 다른 방식의 기림비가 들어선다. 미국 동포들 비영리재단이 교민들 모금으로 기림비 제작부터 선적까지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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