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들을 열심히 지키다보니 내가 투명인간이 될 거 같아요. 하하.”

지난 8일 오후 의원실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다 기자를 만난 추혜선 의원은 이렇게 말을 건넸다. 언론시민단체 출신 정의당 여성 비례대표. 정쟁 위주의 여의도발 소식이 톱 뉴스로 오르내리는 동안, 국회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들과 기자회견장을 바삐 찾는 그를 비춰줄 카메라는 많지 않았다. 약속 깨기용 명분 찾기가 흔한 국회에서 약속을 지켰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4월18일 ‘장애인 영화관람환경 개선’을 위한 법안 발의를 알린 기자회견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부끄러웠다. 앞으로 항상 수어통역을 함께 진행하겠다고 약속드린다”고 밝혔던 그는, 실제로 매 기자회견 수어통역을 병행했다. 지난달 19일엔 장애인들과 함께 국회 기자회견장과 보건복지위원회부터 단계적으로 수어통역과 장애인 보조 시설을 확대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를 의무화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 발의도 준비 중이다.

이날 인터뷰 도중 추 의원은 “시·청각 중복 장애인 분들은 대화를 어떻게 나누는지 아느냐”며 기자의 두 손을 잡고 “손을 잡고 이렇게 (수어를) 하면 점자 언어처럼 농아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소통과 언어다. 언어가 단절됐다는 건 차별의 벽이 있다는 거다. 국회가 최소한 이런 중요한 가치에 대해 약속을 지켜야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첫 단추를 끼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지금까지 10여회 기자회견에 계속 수어통역사를 모셨는데 기꺼이 와주셨다. 기자회견은 전문용어가 많고 어려운 표현이 많은데 이런 걸 많이 해봐야 표현력이 풍성해지기 때문에 힘들지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 추혜선 정의당 의원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위치한 의원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 추혜선 정의당 의원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위치한 의원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추 의원은 “가끔 자막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냐는 분들이 있는데 시대착오적이고 인권감수성이 떨어지는 얘기다. 언어는 실시간으로 소통이 돼야 하지 않느냐”며 “국회 뿐 아니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입장을 전하는 장소에서도 수어 통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메시지가 차별적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미디어 운동장에서 활동했던 활동가 출신이다. 미디어라는 보편적 권리를 차별없이 누려야 한다는 건 본능적 철학”이라고 밝혔다.

정치권 안팎에서 꾸준히 ‘언론개혁’ 목소리를 내왔던 그에게 최근 언론 환경에 대해 물으니 “정권이 바뀌면서 지난 10년 동안 훼손된 부분들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면서도 “여전히 언론 환경은 불행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추 의원은 “부도덕한 권력을 걷어냈다고 독립성을 훼손하는 환경이 해소된 건 아니다. 법·제도적 개선은 국회 몫인데 국회도 이걸 해소할 만한 지형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가졌던 언론장악 의도를 그대로 가진 정치집단이 ‘거대 야당’으로서 버티는 상황에서 법·제도 개선이 다 막혀있다. 특히 공적 영역의 언론은 민주주의 수단인데 지금은 정쟁 이슈만 돼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도 언론도 국민 신뢰를 잃은 부분은 뼈아프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가 상대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고 해서 국회나 언론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했다. 그는 “언론을 통제 대상으로 보는 프레임은 지금도 여전하다.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고. ‘가짜뉴스’ 폐해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만 청와대가 나선다는 건 과거 ‘박근혜 유언비어 소탕 작전’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 한국농아인협회, 장애벽허물기, 정의당 장애인위원회와 추혜선 의원 등이 7월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서 국회 주요 사안에 대한 수어통역 실시를 청원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수어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 한국농아인협회, 장애벽허물기, 정의당 장애인위원회와 추혜선 의원 등이 7월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서 국회 주요 사안에 대한 수어통역 실시를 청원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수어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최근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 사퇴를 둘러싼 논란에도 “방통위원장 임기가 보장이 안 됐다는 걸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언론과 방송을 대하는 데 있어서 지난 정부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문재인 정부 성공을 위해 원활한 ‘팀워크’에 도움이 되고자 대통령께 사의를 표했다”고 밝힌 뒤 논란이 일자 “압력에 의해 타의로 떠나는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지난 2일 언론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위원장 사퇴는 문재인 정부 미디어 개혁 실패”로 규정하는 한편 정부의 허위조작정보 대응 등을 비판한 바 있다.

20대 국회 후반기 들어 추 의원은 국무조정실·공정거래위·금융위·금감원 등을 소관하는 정무위원회로 이동했다. 그는 “정무위는 중량감 있는 상임위다. 경제를 다루는 데 무게 중심이 쏠려 있지만 사실은 민생을 다루는 상임위”라며 “소수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그릇이, 대다수 국민에게 간장종지만한 그릇이 가는 불평등 구조를 견제하고 구조 타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정무위라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현 정부 들어 가장 먼저 은산분리 완화를 들고 나왔는데, 유일하게 반대한 게 저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득권 정당이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정무위로 배정된 이후 면회를 다니거나 유서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추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 때 난리가 났던 게 ‘단가 후려치기’ 문제다. 특히 자동차 협력업체들이 부도나기 직전까지 몰려 납품을 못하면 공갈죄가 적용된다. 확인된 분들만 16명 정도다. 그분들을 직접 면회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어 “제일 힘든 건 유서를 받을 때”라며 “절대 죽지 마시라, 죽고 싶을 때 전화하라는 말을 듣고 새벽에도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있다. 경제의 어두운 사각지대들을 고치지 않으면. 개혁은 허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 추혜선 의원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촛불청소년인권법연대로부터 받은 해바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 추혜선 의원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촛불청소년인권법연대로부터 받은 해바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추혜선 의원실 제공.

그러나 소수정당이 무슨 힘이 있느냐는 시선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현실적 한계를 느끼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국회에선 일정도 교섭단체들이 정한 대로 통보받는다. 하지만 정의당은 지지율상 ‘제3당’이고 기대치도 높다. 다음 총선에서 분명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재선 출사표를 던진 안양 동안을 분위기에 대해선 “지난번 정진후 당시 원내대표가 출마했을 때 20% 가까이 얻었다. 진보정당을 응원하는 민심이 어느 정도 있는 지역”이라며 “지난 2년 죽어라 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안양에서 정의당 바람이 불고 있다. 대거 많은 분들이 입당하고 계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지역을 돌아다니느라 망가진 운동화가 두 켤레라며, 열 켤레가 닳아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존재감이 미약하다는 비판도 있는 걸 안다. 그런데 존재감만 찾으려고 하면 아픈 사람들 손을 잡기 힘들다는 딜레마가 현실적으로 있다. 그래도 생사 기로에 놓인 사람들이 절박한 순간에 떠올리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며 “언론도 바닥의 가장 아픈 사람들을 비춰주시라. 언론이 비춰주지 않으면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고 거듭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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