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S씨는 지난 2월 귀국하기로 했다. 그는 ‘출국 후 퇴직금 수령 제도’에 따라 공항에서 퇴직금을 받는 데 필요한 공문서들을 준비했다. 고용센터와 지역은행, 사업주, 항공에이전시도 찾았다. 그러나 출국 당일 공항 은행창구를 찾은 S씨는 퇴직금 신청을 거절당했다. 지역은행이 그의 이름 철자를 잘못 등록해서다. S씨는 비행기 예약을 하루 미루고 거래은행을 다시 등록했다. 그러나 이튿날도 퇴직금을 받지 못하고 귀국했다. 출국 예정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A씨는 올초 모든 서류를 준비해 공항에서 퇴직금을 신청했다가 거절 통보를 받았다. 그의 고용주가 ‘A씨가 갚은 부채가 남았다’며 지급보류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A씨가 떠나기 전 밖에 내놓은 가구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놓지 않자, 사장이 화가 나 퇴직금 지급을 막았다. 보류신청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A씨는 사장을 직접 찾아 스티커값 몇 만원을 손에 쥐여주고서야 출국할 수 있었다.

‘불법체류’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이주노동자가 출국한 뒤 퇴직금을 받도록 한 ‘출국만기보험제도’가 오히려 퇴직금을 못받고 떠나는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인권단체들이 고용허가제 15주년을 맞아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는 12일 오후 서울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한국에 체류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 92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퇴직금 수령 절차를 제대로 아는 이는 소수에 그쳤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는 12일 오후 서울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는 12일 오후 서울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고용노동부는 지난 2015년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이주노동자가 출국하기 전까진 출국만기보험금(퇴직금)을 받을 수 없고, 출국 뒤 14일 안에 받도록 했다. 출국만기보험금은 이주노동자 퇴직금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험으로, 고용주가 의무 가입해야 하는 노동자 전용보험이다. 삼성화재가 노동부와 사실상 독점계약을 맺어 출국만기보험 사업을 맡는다.

이주노동자 상당수가 퇴직금 받아내는 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출국만기보험금 계산법과 절차, 보험금을 빼고 남은 잔액(잔여퇴직금)을 따로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국내 이주노동자 712명 가운데 23명(3.2%)에 그쳤다.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 응답자 10명 가운데 6.4명(712명 중 452명) 꼴로 퇴직금 계산법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퇴직금 계산법을 안다고 밝힌 이들도 절반만 본인 퇴직금 총액을 맞혔다. 출국만기보험금을 받는 절차를 모르는 이도 10명 중 4명에 달했다(285명). 이주노동자들은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출국만기보험금이 자신의 퇴직금 총액보다 적으면 잔액을 회사에 청구해 받아야 하는데, 이 사실을 모른다고 답한 응답자가 절반이 넘었다(397명, 55.8%).

한편 고국에 돌아간 응답자 77명 가운데 67명이 출국만기보험금을 받았다. 그러나 표본의 특수성이 있다. 이들은 “이주인권단체가 접촉한 귀국 노동자들은 퇴직금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 차원의 객관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서도 잔여퇴직금까지 받아낸 노동자는 절반(54.3%)이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는 12일 오후 서울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는 12일 오후 서울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이주노동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제도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출국 후 퇴직금 수령 제도’가 복잡할뿐더러, 정부가 관련 절차를 제대로 알리지 않아 이주노동자들이 퇴직금을 받기 어렵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안 그래도 수령 절차가 복잡한데, 이주노동자들은 겨우 출국 며칠 전 이를 처음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가 퇴직금을 받으려면 △출국예정사실 확인서 △거래외국환은행 지정신청서 △보험금 신청서 △여권 사본 △외국인등록증 사본 △비행기티켓 사본 △개인정보수집이용조회 제공동의서 등 서류를 제출해 승인 받아야 한다.

박다혜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정부가 정보제공 의무를 손놓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다혜 변호사는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차별대우한다는 것은 정부도 인정하는 사실인데,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책무를 놓고 있다”며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잔여퇴직금 미지급 노동청 진정 절차까지 안내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특히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잔여퇴직금이 없다’거나 ‘공항에서 준다’고 거짓말하는 건 명백히 형법상 사기행위다. 고용노동부가 이같은 기망행위가 공공연한 사실을 확인한 이상 구체적인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국적을 이유로 임금 성격의 퇴직금을 제때 주지 않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지적도 나왔다. 박다혜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은 사업주가 퇴직 다음날부터 14일 이내에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현행법은 이주노동자에게만 그 시점을 ‘출국’으로 다르게 적용한다. 노동자에게 보편으로 보장해야 할 권리를 불합리하게 침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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