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과 우수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이 경제전쟁을 선전포고한 상황에서 맞는 광복절은 착잡하다. 

3‧1혁명 100돌에 맞춰 낸 소설을 놓고 지상파방송에서 대담을 나눌 때였다. “이래서 현대사를 들여다보기 싫어요. 우울해지거든요.” 진행자가 녹화 중간에 쓸쓸한 미소로 건넨 말이다. 의열단 김상옥이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10발을 맞고도 싸우다가 마지막 한발로 자결한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언론계 후배이전에 젊은 세대가 우리 역사에서 느낄 비애가 새삼 사무쳤다. 

모든 우울이 병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자 김동규는 <멜랑콜리 미학>에서 서양 철학과 예술을 관통하는 우울을 포착했다. 슬픈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우울은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멜랑콜리에는 우울과 우수, 비애가 두루 담겨 있다. 

나는 젊은 세대가 현대사를 톺아보며 충분히 우울해지기를 소망한다. 기실 지상파 시사방송마저 ‘재미’를 좇는 세태야말로 우리를 ‘우울증’에 내몬다. 우울증은 ‘우울에서 매력이 빠진 것’이라는 수전 손택의 말을 빌리자면, ‘매력 있는 우울’ 또는 우수에 잠겨보길 권하고 싶다.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를 비롯한 내빈들이 지난 3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했다. 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를 비롯한 내빈들이 지난 3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했다. 사진=청와대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에 조국은 3‧1혁명을 ‘100년 전 촛불혁명’이라 주장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단순한 은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법학자 조국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지나쳤지만, 3‧1혁명은 실제로 촛불혁명이었다. 1919년 1월5일부터 2월22일까지 천도교의 동학인들이 날마다 저녁 9시에 촛불을 밝혔다. ‘49일 특별기도’를 봉행한 소설 『100년 촛불』의 장면은 실화다. 3‧1혁명에 앞선 49일 촛불기도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힘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흔히 동학혁명과 3‧1혁명 사이가 까마득하다고 여기기 십상이지만, 겨우 25년이다. 1987년 6월대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 사이보다 가깝다. 실제로 동학혁명에 나선 20대들이 40대 후반이 되어 3‧1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33인의 대표 손병희는 동학혁명 시기에 녹두 전봉준의 아우로 의형제를 맺었다. 

동학혁명과 3‧1혁명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고,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웅숭깊은 사상으로 이어져있다. 20대에 동학혁명에 나섰고 40대에 3‧1혁명에 나선 천도교 고위간부들의 촛불 기도에 담긴 그 사상은 단재 신채호를 거쳐 21세기의 촛불혁명으로 연면히 이어져왔다. 

3‧1혁명의 촛불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독립을 주장하지 않았다. 독립해서 어떤 나라를 이룰 것인가를 성찰했다. 우리가 독립해 세울 나라는 일본제국의 행태와 달라야 했다.

그런데 100년이 흐른 2019년, 청와대나 국회에서 일본과 경제전쟁을 다짐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에선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을 이기자고 한다. 그 심경은 이해하지만 이기고 질 문제가 아니다. 앞선 칼럼 ‘조용한 일본인 귀하’(7월15일)에서 제안했듯이 두 나라의 내일을 열어갈 민중 사이에 연대를 염두에 둔 언행이 아쉽다. 협량한 아베 따위와는 품격이 다른 도덕적 우월성을 지녀야 한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는 모쪼록 그런 내용이 담기길 기대한다.

바로 그렇기에 일본과의 경제전쟁을 내세워 노동정책이 더 후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저들에 지는 꼴이다. 일본의 부품 기술이 강한 까닭은 현장 노동을 중시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노동인들의 창의성이 자유롭게 구현되는 일터는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대처는 물론 소득주도성장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절실한 과제이다. 노동과의 지지부진한 대화를 더 미루기보다 촛불정신에 걸맞은 새로운 다짐으로 진솔하게 다가서야 옳다.   

무릇 국민의 힘을 모을 때 고갱이는 언제나 ‘민주적 내실’이다. 우리는 이미 100년에 걸쳐 촛불혁명을 다듬어왔다. 그 역사적 성취를 국가 간 승패나 총선의 유‧불리 따위로 축소한다면 참으로 속상한 일이다. 광복절의 우수에 잠겨 촛불을 밝히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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