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기자 폭행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1학년때인 1970년 11월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하자 정부의 노동착취에 항의시위를 벌인 뒤 1971년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했고, 학교에서 5년간 제적됐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노했던 대학생이 50년이 지난 지금 독도는 일본땅이고,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는 강제동원된 게 아니라고 주장하게 됐을까.

이영훈 교수가 이번에 여러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함께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논란의 중심이 됐다. 이 책에서 이영훈은 미국 국무부가 1951년 8월 한국정부에 보낸 문서를 언급하며 “독도 관련한 우리(미국) 정보에 따르면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면서 이를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라고 주장했다. 반대되는 역사자료도 수없이 많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도 일본이라는 이 이상한 적의 실체를 몰라 루스 베네딕트라는 인류학자에게 연구를 의뢰했을 정도로 동아시아를 몰랐다. <국화와 칼>(1946)은 이렇게 나온 책이다. 미국이 1945년 이전에 한국을 깊이 고민한 적이 있을까.

이영훈 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군, 미군, 심지어 한국군 위안부도 있었는데, 한국인은 일본군 위안부에만 유별나게 흥분한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밑바닥에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종족주의적 적대감정이 도사리고 있다”며 <반일 종족주의>를 주장한다.

박현채·안병직·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 세 사람

이영훈 교수를 이해하려면 그의 스승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고 박현채 교수를 떼어놓을 수 없다. 세 사람은 서울대 55학번과 57학번, 70학번으로 같은 경제학과 선후배다. 세 사람은 80년대 중반까지 함께 연구하고 함께 휴가를 보내는 사이였다. 1995년 박현채 교수가 사망하자 남은 두 사람은 운동권 연구자에서 나란히 뉴라이트 이론가로 변신했다.

두 사람이 2006년 만나서 나눈 얘기를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2008)엔 <반일 종족주의>의 맹아가 엿보인다. 대담집 끝에 실린 ‘대담 후기’에서 이영훈은 “지난 400년 동안 우리 역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영훈은 그만큼 이 책에 무게를 실었다. ‘400년’은 임진·정유 두 왜란이 끝난 시점부터 대담이 이뤄진 2006년까지 기간을 말한다.

대담집에서 이영훈은 스승 안병직과 인연을 이렇게 소개한다. “대학 들어와 안병직 선생님을 만난 지 37년이다. 그간 내 인생은 안 선생님을 빼고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지시로 서당에 들어가 사서삼경을 읽었고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를 시작했다. 내 인생 행로가 결정됐다. 37년 만남과 배움에서 안 선생님은 언제나 연구자로서 정직했다. 모택동주의자였을 때도 그랬고 신고전파 성장이론으로 전향한 뒤에도 그랬다. 그래서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지한 구도의 길이었다.” (2007년 11월 6일 이영훈 씀)

두 사람은 1970년 교수와 제자로 만나 49년을 함께 했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다. 두 사람 사이엔 박현채 교수도 빠질 수 없다. 고 박현채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55학번으로 안병직의 2년 선배다.

안병직을 운동권 강사로 이끈 박현채

60~70년대 안병직이 운동권 강사가 된 데에는 박현채 교수의 영향이 컸다. 안병직은 이영훈과 나눈 대담집에서 1961년 대학원생이 돼 박현채 선생을 만났던 장면을 “박현채 선생을 만나면서 쉽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했다. 박현채 선생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고 회고했다. 마르크스주의로 변신한 대학원생 안병직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백남운 교수의 <조선사회경제사>를 읽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안병직은 마오쩌둥에 심취해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을 주창했다.

▲ 80년대초 고 박현채 교수의 고향인 전남 화순 적벽에서 찍은 사진이다. 맨왼쪽이 박현채 교수, 한 사람 건너 안병직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 80년대초 고 박현채 교수의 고향인 전남 화순 적벽에서 찍은 사진이다. 맨왼쪽이 박현채 교수, 한 사람 건너 안병직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4·19땐 후배들에게 떠밀려 참가했던 안병직은 대학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과 연을 맺었다. 안병직은 김중태(61학번), 김정남(61학번), 김근태(65학번) 등의 후배를 통해 학생운동에 관여했다. 안병직은 그 시절을 “나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소문난 학생운동 강사였다”고 회고했다.

이영훈·김문수에게 ‘노동운동하라’고 권한 안병직

안병직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김수행, 신영복과 호형호제했다. 안병직은 통혁당 사건 이후 지식인 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이영훈과 동기 김문수는 대학 2학년때인 1971년 안병직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안병직은 “내가 자네들 나이였으면 교수가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이영훈은 “김근태 선배가 저와 김문수, 김재근, 이채언을 불러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하라고 했다. 저와 이채언은 페인트 공장, 김문수와 김재근은 미싱공장에 갔다. 한 달 보름 만에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나왔다. 저는 도저히 육체노동은 못하겠더라고요. 야간작업을 하다가 한두 시쯤 졸음이 찾아와 버티질 못해 기계를 세워놓고 잤다. 머리가 빙빙 돌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안병직은 “박현채 선생과 나는 인간적으로 굉장히 깊었다. 박현채 선생은 나를 매우 반겼다. 70년대 들어와 박 선생과 내가 이념논쟁을 시작한다”며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이 이 때부터 싹텄다고 했다. 안병직은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을 박현채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폈다.

안병직은 “박현채 선생은 계급이론만으로 일관성 있는 이론을 구성해야 한다고 봤다. 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결합해 이론을 구성한 마오쩌둥 이론을 따랐다. 박 선생은 이론적으로 수미일관되나 시대적 과제를 도출할 수 없었고, 내(안병직) 인식은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했으나 논리적 정합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영훈은 두 사람이 논쟁하던 70년대에 “안병직 선생이 마르크스주의나 마오쩌둥주의 입장에서 한국 경제가 곧 파탄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안병직은 “나도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이론을 가지고 현실을 설명하려는 그릇된 생각을 했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이런 편향이 점점 강해진다”며 전향을 예고했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거쳐 ‘식민지 근대화론’ 전향

안병직은 마오쩌둥주의에 기반한 자신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중진자본주의론’으로 나아간 과정에 대해 “1984년 ‘역사평론’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봤다. 제3세계도 자립적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동경대에 간 건 한국경제에 새 인식을 얻기 위해서다. (내가) 일본 체류중 86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섰다. 충격이었다. 이것이 내가 ‘중진자본주의론’을 수용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안병직은 1985~1987년 일본 유학에서 신세계를 경험했다. 나카무라 사토루는 ‘중진자론주의론’을 주창해 안병직 등 한국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고 안병직은 이를 신세계처럼 받아들였다.

이영훈은 1899년부터 건설된 철도가 1942년 2233km까지 늘었고, 1940년대가 되면 조선에서 남자 아이 취학률이 60%에 도달하고 소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교육제도가 수미일관하게 정비됐다고 주장한다. 이에 안병직은 “1940년대 북한에 건설된 군수 관련 중화학공업의 규모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200명 이상 대규모 공장이 무려 220여개에 달했다. 해방 당시 북한은 세계적으로 유수한 공업지대였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안병직이 든 사례는 키무라 미츠히코 교수라는 일본학자의 연구결과다. 두 사람은 통계자료나 경제지표를 맹신하는 수리경제학의 전형을 추구한다. 통계나 지표가 완벽하다면 굳이 역사학에 ‘구술사’ 같은 새로운 영역이 자리할 이유도 없다. 통계가 늘 올바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일제강점기의 통계는 뒤집어 보는 맑은 눈이 없으면 숫자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가에 사회주의자였던 이여성과 김세용이 1931~1935년에 내놨던 <숫자 조선연구>를 최근에 새로 펴낸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은 두 사람 같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얘기가 왜 잘못인지 밝혀줄 것이다.

‘친일파’를 ‘주저하는 협력자’로 창씨개명

식민지 근대화론을 위해 이영훈은 박지향 교수의 <제국주의>란 책을 끌어온다. 이영훈이 “(<제국주의>에서 박 교수가) 제국의 식민지 지배는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것만큼 강력하거나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제국은 낯선 곳에서 망설이고 두려워하면서 협력자를 구해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부분을 언급하자, 안병직은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무분별하고 자의적 폭력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고 첨언했다.

이영훈은 “일제와 협력이 불가피했던 하급관료나 전문직 중심의 테크노크라트형 친일파”를 박지향 교수처럼 ‘주저하는 협력자’로 분류하면서 “대한민국을 세운 세력은 크게 봐서 ‘주저하는 협력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영훈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수탈해 갔다는 주장은 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신화다. (식민지 조선에는) 차별과 종속 속에서도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근대경제를 일으켜 세울 여러 가지 조건이 성숙되고 있었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거듭 주장했다.

이영훈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이 본격화된 80년대에 “이대근 선생이 ‘주변부 자본주의론’을, 박현채 선생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주장했다. 일본에서 돌아오신 안병직 선생은 ‘중진자본주의론’을 내세워 논쟁이 뜨거웠다”고 했다. 이영훈은 “박현채 선생이 80년대 한국사회를 신식민지로 이해한 건 지극히 관념적”이었다며 박현채와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1988년 함께 지리산 등반하고 돌아오면서 서울의 올림픽대로쯤 와서 이영훈은 “박현채 선생에게 ‘저 도시의 불빛을 보십시오. 저것이 어떻게 신식민지입니까’라고 했더니 박현채 선생이 어찌나 화를 내든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 80년대 후반 박현채 교수와 이영훈 교수는 지리산을 함께 등반했다. 맨오른쪽이 이영훈 교수, 바로 옆이 박현채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 80년대 후반 박현채 교수와 이영훈 교수는 지리산을 함께 등반했다. 맨오른쪽이 이영훈 교수, 바로 옆이 박현채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안병직은 자신이 주장했던 ‘반(半)봉건’의 뿌리를 일본에서 차용했다고 고백한다. 안병직은 “‘반봉건’은 일본 학계가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을 해명하려고 제기한 이론”이며 ‘반봉건’을 내세웠던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객관적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관념으로서 허상이었다. 남의 이론을 흉내 내기 급급했다”고 고백했다.

일본학자에게 배워 온 ‘중진자본주의론’

2년여 일본 생활에서 ‘반봉건’을 넘어 ‘중진자본주의론’을 수용하고서 1987년 귀국한 안병직은 “노동운동하는 김문수를 만나, 달라진 내 생각을 얘기했더니 잠자코 듣던 김문수가 딱 한마디 했다. ‘선생님, 너무 변했습니다’고 하더라. 1년 뒤 김문수가 다시 나를 찾아와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노조가 자금도 생기고 의식도 높아져 제가 해줄 것이 없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문수는 그야말로 껍질을 벗는 고통을 겪으면서 변신에 성공했다. 나도 많이 설득했다. 그 결과 제도권 정치에 성공적으로 입문해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본래 정치가가 될 훌륭한 자질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로 꼭 성공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문재인은 김정은의 기쁨조’에 이어 지난달엔 ‘지금은 친미·친일을 해야 할 때’라는 막말로 논란이 됐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선진국 도약, ‘캐치업’

1987년 귀국한 안병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연구는 ‘실증’뿐”이라며 곧바로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창립해 본격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폈다.

▲ 1987년 낙성대경제연구소 창립 때 안병직(왼쪽) 교수와 이영훈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 1987년 낙성대경제연구소 창립 때 안병직(왼쪽) 교수와 이영훈 교수. 사진=‘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안병직은 한국 같은 저개발국가가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해 선발국을 서서히 따라잡는다는 ‘캐치업 이론’을 주장했다. 이것이 ‘중진자본주의론’의 골간이다. 이영훈은 스승의 캐치업 이론으로 한국경제사를 설명한다.

두 사람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합의가 한국이 선진국을 캐치업할 환경을 조성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1964년 한국 국교정상화를 반대한 대학가의 시위(6·3세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의 결집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지도자급 인사들은 거의 6·3세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늘날 되돌아보면 6·3세대의 주장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했다. 이에 안병직은 “한국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는 오늘날 보면 완전히 시대착오였다. 당시엔 자생적 경제발전만을 생각했지 캐치업 같은 경제발전의 코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 거들었다.

“일진회는 자유민권 실천한 최초의 민간 정치단체”

친일파를 ‘주저하는 협조자’로 치환시킨 박지향 교수를 받아들인 이영훈은 1904년 친일파 송병준이 설립해 강제병합 전에 이미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벌인 ‘일진회’를 연구한 문유미 박사의 논문을 인용해 “일진회는 한국사에서 자유민권 사상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긴 최초의 민간 정치단체였다”고 소개했다. 이영훈은 “일진회는 동학농민봉기의 후예들도 많이 참가했다”고 첨언했다.

안병직은 노무현 정권 때 불어닥친 과거사 청산작업을 비판하면서 “60년도 더 된 과거사를 사법권도 없는 연구자들이 법으로 판단하는 자체가 심각한 법적 모순”이라며 대동아 성전에 바치려고 전투기 생산공장을 세운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안창호 선생을 옥바라지했다”고 거들었다. 박흥식은 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검거한 매판자본가다.

2008년 대담집에서 안병직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등의 ‘강제동원’을 “왜곡된 집단기억이 만들어 낸 웃지 못할 소극”이라고 지적한다. 이 ‘집단기억’에 ‘샤머니즘과 토템’을 입혀 확대재생산한 게 이번에 나온 <반일 종족주의>다.

대담집에서 안병직은 “모든 동원은 ‘강제동원’이다. 굳이 용어를 ‘강제동원’이라고 쓸 필요는 없다. 처음 모집 땐 일본회사가 조선에 와 직접 노동자를 채용했는데 지원자가 넘쳤다. 강제로 갔다고 할 수 없다”고 강제동원 자체를 부인했다.

두 사람은 위안부 동원도 같은 방식으로 비판한다. 이영훈은 “나는 정대협의 보고서에서 생존 위안부 약 170여 명 가운데 2명이 애초 정신대로 나간 사람임을 읽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을 반영한다. (중략) 정신대를 위안부로 인식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당시의 풍설을 기초로 해 60년대 이후 조금씩 강화됐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이영훈은 “일본 측이 아시아 여성기금의 설치를 추진하자 정대협의 활동가들은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겠구나’라며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는 그 대목을 읽고 충격 받았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여기서도 <반일 종족주의>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강제동원 사례를 묶은 책은 수없이 많다.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에 나오는 12명의 위안부 이야기엔 취업사기는 기본이고, 집 앞 골목에서,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다가 납치된 사례도 나온다. 일본군들은 집으로 돈을 부쳐준다고 했지만 돈을 받은 가족은 없다.

“해외 우수기업 유치에 모든 정책 초점 맞춰야”

▲ 2006년 4월26일 뉴라이트재단 설립. 현판을 든 이가 안병직 교수.  사진=‘대한민국연사의 기로에 서다’
▲ 2006년 4월26일 뉴라이트재단 설립. 현판을 든 이가 안병직 교수. 사진=‘대한민국연사의 기로에 서다’

대담집 결론에서 이영훈은 “신정부(이명박)가 다행히 세계화 정책을 내건다면 모든 것을 거기에 걸어야 한다. 해외의 우수한 기업을 유치하는 데 모든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끝맺는다. 이영훈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그 나라의 경제성장이 외국인 기업의 투자에 의해 주도됨을 인상 깊게 관찰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는 이미 존 필저 기자의 탐사보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도 비슷하다. 최저임금이 중국보다도 턱없이 낮고, 공업지역 최저임금이 오히려 농촌지역의 절반에 불과한 인도네시아에서 시장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외면하면서 해외 우수기업만 유치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이 경제학자가 한때 전태일의 죽음에 분노했던 지식인이었다.

이영훈은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의 위대함을 신봉하는 전형적 근대주의자일 뿐이다. 이 때문에 근대화, 즉 자본주의에 내재한 폭력성을 보지 못한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와 그 승계자들이 만든 ‘자유주의’ ‘자본주의’ 구조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400년 동안 폭력을 경험한 수많은 국민이 종종 터져 나오는 정치권과 고급관료들의 ‘친일’ 발언에 왜 그렇게 치를 떠는지, 그 이유가 뭔지 진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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