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자신을 향한 폴리페서 논란에 ‘앙가주망(지식인의 사회참여)은 학자의 도덕적 의무’라고 반박했다. 임명직 공무원으로 일한 조 전 수석의 교수직 휴직은 법률과 서울대 학칙상 문제가 없다. 그는 전공이 ‘형법’이라 울산대 강사시절부터 검찰개혁과 검경수사권 조정 등 형사사법체계 혁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평생 연구 작업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라며 임명직 공무원 진출을 앙가주망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앙가주망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작가 에밀 졸라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폭로한 ‘나는 고발한다’만큼 앙가주망에 적확한 지식인의 실천은 드물다. 

유태인 방적업자의 아들 드레퓌스(1859~1935)는 무미건조한 프랑스 군인이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프랑스 육군성에 근무하다가 그해 독일 대사관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넘긴 죄로 체포됐다. 간첩죄를 쓴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악마의 섬’ 수용소에 수감됐다. 그는 ‘공공의 적’이 됐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념에 회의를 일으킬 만큼 강렬했다. 그의 무죄를 뒷받침할 증거는 많았지만 반유대주의 여론은 그를 매도했다. 

▲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당시에도 언론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드레퓌스의 형 마띠외는 동생을 구하려고 영국 신문 ‘사우드 웨일즈 아거스’에 동생이 악마의 섬을 탈출했다는 허위기사를 싣게 했다.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은 사실확인도 않고 기사를 받았고, 파리의 모든 신문들도 그 뒤를 따랐다. 프랑스신문 ‘자유언론’은 드레퓌스의 탈출을 도왔다는 헌터 선장이란 가공 인물까지 만들어 인터뷰까지 했다며 지면에 버젓이 실었다.

가톨릭계 프랑스 청년들은 연일 드레퓌스를 사형시키라고 시위를 벌였다. 우파 청년들은 유태인을 군과 공직에서 모두 추방하라고 외쳤다. 좌파도 침묵했다. 그들은 드레퓌스가 대위쯤 되니 이렇게 언론들이 시끄럽지 노동자가 당했다면 눈도 꿈쩍 안 했을 거라며 우파들의 집안 싸움쯤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4년이 지나고 잊혔던 드레퓌스를 여론의 용광로 위에 올린 이는 작가 에밀 졸라다. 그는 1898년 1월13일 클레망소가 펴내는 신문 ‘오로르’(새벽)에 ‘나는 고발한다’를 실었다. 당일 그 신문은 20만부나 팔렸다. 졸라는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겼고, 드레퓌스를 모함한 에스테라지가 증거를 조작한 줄 알면서도 석방했다고 폭로했다. 기울어진 저울추를 바로 잡는 데는 그로부터도 8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Émile Édouard Charles Antoine Zola)
▲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Émile Édouard Charles Antoine Zola)

12년만에 복권된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시신 이장식에도 참석했다. 그때도 반유태계 신문기자가 총격을 가해 팔에 상처를 입었다. 예편하고 스위스에 살던 드레퓌스는 1차대전 때 군에 복귀해 파리 북부 베르덩 전투에 참전하고 중령으로 승진했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고발한 건 그가 높은 관직을 가져서가 아니다. 앙가주망은 공무원 임용 여부와 아무 상관없다. 

▲ 자크 랑 (Jack Lang) 전 프랑스 문화장관. ⓒ 연합뉴스
▲ 자크 랑 (Jack Lang) 전 프랑스 문화장관. ⓒ 연합뉴스

물론 프랑스에도 관직에 임용돼 앙가주망을 실천한 사람도 있다. 미테랑 내각의 문화부장관에 발탁돼 10년간 프랑스 문화정책을 지휘했던 자크 랑 전 장관은 2011년 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다. 우파 쪽에서도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드골 내각의 문화부장관으로 10년간 일했다. 

앙가주망은 사르트르가 자주 사용했다. 오늘날 앙가주망은 ‘지식인의 사회참여’로 좁혀졌지만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을 정치행동이나 사회참여에 한정하지 않았다. 공무원 임용 여부를 떠나 더 많은 지식인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게 앙가주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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