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째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일하는 서울시민을 위한 노동상담을 해왔다. 일하는 사람들이 갖는 궁금증은 가지각색이지만 매일 상담하다보면 시기별로 문의 주제나 이슈가 있다. 연말에는 계약기간 만료나 갱신기대권, 퇴직금 상담이 많고, 연초에는 미사용 연차수당 문의가 노·사 양측에서 밀려온다. 법 개정 때면 그 내용 문의도 많은데 7월16일 직장내괴롭힘법(근로기준법 개정) 시행에 따라 일터괴롭힘 문의가 많아졌다. 상담에서 끝나지 않고 권리구제지원까지 이어지는 사건도 종종 경향성이 있다. 올해는 유독 인사발령, 그 중에서도 ‘전보’ 사건이 눈에 띈다. 

전보는 노동자의 업무 종류, 내용, 장소 등에 변경을 가져오는 인사발령을 말한다. 대법원은 “전보가 노동자에게 불이익한 처분이라고 해도 원칙적으로 인사권자인 사용자의 권한에 속하기에 업무상 필요한 범위 안에서는 상당한 재량을 인정하되 그것이 근로기준법에 위배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효라고 볼 수 없고, 정당한 인사권의 범위에 속하는지는 전보의 업무상 필요성과 그로 인해 노동자가 겪을 생활상 불이익의 무게를 따지고 전보 과정에서 신의칙상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통해 종합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 직장인 자료사진. ⓒ gettyimagebank
▲ 직장인 자료사진. ⓒ gettyimagebank

 

문제는 판례상 ‘구체적인 업무상 필요성’ 판단 기준에 업무능률 증진이나 기업의 재개편만이 아니라 직장질서 유지나 회복, 노동자간 인화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콜센터에서 사무직으로 2년 근무하다가 아웃바운드(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업하는 업무)담당으로 전보된 20대 A씨는 옆 부서 상급자와 한차례 언쟁했다는 이유로 시말서 작성을 요구받고, 이를 거부하자 전보됐다. 또 다른 예로는 국내 유명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던 B씨는 업무능력도 뛰어나고 동료들 신망도 두터웠다. 그러나 지난해 입사한 직상급자와 업무스타일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겼고, 직장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기존의 경력경로와 전혀 다른 업무로 전보됐다. 

사실 일부 사용자들이 징계보다 인사발령의 재량권이 넓게 인정되는 점을 이용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보발령으로 노동자의 자진사퇴를 유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최근엔 누가 봐도 부당해 그 의도가 뻔히 보이는 전보가 아니라 마치 징계감이지만 스스로 쇄신할 기회를 부여하려고 새로운 곳으로 전보발령하는 식의 조심스럽고 찜찜한 전보가 많아졌다. 위의 두 사례 또한 사용자 주장만 놓고 보면 전보가 아닌 징계사유에 더 가깝지만 징계 대신 전보명령을 활용했다. 

▲ 서재란 서울노동권익센터 공인노무사
▲ 서재란 서울노동권익센터 공인노무사

차라리 징계 처분이었다면 취업규칙 상의 내부 절차를 거쳐 소명의 기회도 얻고,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통해 사유의 정당성이나 양정 과다를 이유로 부당징계로 다툴 수 있다. 그러나 인사발령 형식으로 이루어지면 절차적 제한도 양정 문제도 인사 재량권이라는 이름에 묻혀버린다. 직장질서나 인화를 이유로 한 인사발령은 대상 노동자를 심각한 직장질서 파괴자로 낙인찍거나 업무 소통 부재자로 만들기 쉬워 드러나지 않는 근로자의 불이익이 크다. 또 원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일은 노동자 개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전보로 인한 노동자의 주관적 생활상 불이익은 인사상 불이익이라고 여기기도 어렵다. 따라서 인사발령의 업무상 필요성은 깊은 고민과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사용자가 인사권을 방패삼아 징계를 내리기 애매할 때 손쉽게 찾아 쓰는 대안으로 삼거나 부당징계 구제신청 절차에 따른 안팎의 리스크를 피하려고 전보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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