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6173명 중 484명. 지난해 전체 난민신청자 수 중 예멘인 숫자다. 0.03%가 한국사회에 만든 파급효과는 꽤 컸다. 무려 71만4875명이 난민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했다. 당시에는 거리에 예멘인이 여러 명 모여 있기만 해도 기사가 됐다. 불안감과 공포는 커졌다. 서울과 제주 등지에서 난민 반대 집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어서, 젊은 남성이라서, 무슬림이라서 ‘가짜 난민’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다. 그만큼 ‘난민’은 우리에게 낯선 질문이었다. 

1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에서 예멘인은 그 수와 상관없이 ‘난민’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먼저다’, ‘일자리 뺏어가는 가짜 난민’이라며 달린 댓글들에 답을 내놓으려면 이 질문들이 먼저 필요했다. 많은 두려움이 무지에서 출발한다. 불필요한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지난해 6월29일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지난해 6월29일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4월부터 수원을 시작으로 한달 간 서울 이태원과 대림동, 경기도 수원, 전라남도 영암과 제주도로 예멘인을 찾아 나섰다. 취재는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몇몇 취재원은 “정말 예멘인을 돕고 싶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이제야 조용해졌는데 다시 언론에 오르면 오히려 이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여기 와서 시위 한다든가, 해코지 할까봐 걱정된다는 이유도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예멘 난민 사태가 이들에게 남기고간 상처였다. 

어렵사리 8명의 예멘인을 만났다. 그러나 곧이어 다음 난관이 찾아왔다. 취재원들이 얼굴을 드러내길 원치 않았다. 야스민은 지난해 한 언론사와 인터뷰한 뒤 ‘악성댓글’에 시달렸다. 알리(가명)은 신원이 공개되면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라만(가명)은 출입국외국인청에서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모두 납득이 가는 이유들이었다. 동시에 난민이 처한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라마단이라는 생각지 못한 마지막 변수도 한몫했다. 무슬림은 라마단에 해가 떠 있을 동안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한다. 예정됐던 인터뷰가 취소되거나 늦어지기도 했다. 지금껏 몰랐던 문화와 종교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난민 인정자부터 인도적 체류허가자, 난민불인정자까지 한국에서 보낸 지난 1년의 시간에 입을 열었다. 모두 전쟁 때문에 계획했던 미래가 완전히 틀어지고, 본국에 가족을 남겨둔 채 1만km 이상을 도망쳐 온 이들이었다. 언제나 슬프고 외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보낸 1년의 시간에는 환대와 도움의 자취도 켜켜이 배어 있었다. 예멘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친구들이 생겼고, 새 생명을 품었고, 연애를 시작하거나 결혼한 이도 있었다. 낯선 환경이지만 삶의 가능성과 미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애환이 저마다 존재했다. 

▲ 김영화 시사IN 기자
▲ 김영화 시사IN 기자

난민 기사가 나가고 해당 지역에 시위가 발생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다행히 듣지 못했다. 대신 ‘감성팔이 하지말라’는 항의 메일을 여럿 받았다. 여전히 왜 우리가 난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아마 속 시원하게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 가지 명확한 점은 예멘 난민 사태를 기점으로 불거진 반대 목소리만큼,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신호들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난민이라고 뭉뚱그려진 집단 속에 N개의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달 간 예멘인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확인했던 하나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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