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온적이나마 추진하던 노동정책들을 일단 멈췄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시작한 직후인 지난달 5일 강천석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한다며 문재인 정권이 꺼버린 모든 연구소의 컴퓨터를 다시 켜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한일갈등 이전부터 문재인 정부를 ‘반(反)기업’으로 몰던 조선일보는 어떤 대책을 내놓든 정부를 탓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8일 사설에서 “오후 6시만 되면 연구자·기술개발자를 강제 퇴근시키는 무리한 주 52시간 근로를 밀어붙여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자해정책을 쏟아 내놓고 이제와 기업들과 대책을 논의한다”며 또다시 주 52시간제를 겨냥했다.

일부 언론과 보수 야당이 친기업·규제완화를 잇따라 주문하고 양국 갈등이 깊어지자 정부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달 14일 대통령을 대신해 “취임 3년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달성할 수 없게 됐다”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는 같은달 19일과 22일 각각 주52시간 예외, 특별연장근로 등을 거론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6월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6월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면서 청와대는 ‘단합’을 주문했다. 일본이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자 문 대통령은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우리 기업·국민들에겐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 “역경을 오히려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겠다”, “함께 단합해 주실 것을 국민들께 호소드린다”고 했다.

과거 한국은 어떻게 역경을 지나왔을까. 국제통화기금(IMF) 지원 직전인 1997년 11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은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해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다음해 2월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식에서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노동자·서민을 희생시켜왔다.

문 대통령은 자신을 대선기간 ‘준비된 대통령’으로 홍보했지만 노동 분야에서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선 한달 전인 2017년 4월초까지도 문 후보는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미 심상정·유승민 후보는 2020년까지, 안철수 후보는 2022년까지 1만원을 만들겠다고 공약한 상태였다. 

박근혜 탄핵직후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란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캠프는 외연확대라며 보수 인사들을 포섭하고, 후보는 토론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등 우클릭 행보를 보였다. 후보와 측근들이 비정규직법안 등을 주도한 참여정부 핵심 일꾼이라 ‘새 정부가 열악한 노동자들 삶을 살릴지’ 우려가 나왔다.

문 후보는 대선 직전인 4월13일에서야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만들겠다”고 했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면 자영업자·중소기업 등이 어려워진다는 지적에 대응책이나 구체적인 설득논리까지 내놓진 못했다.

2004년부터 근로기준법상 주 40시간제였지만 어느새 연장노동까지 포함한 주 68시간까지 후퇴했다. 근기법을 개정해 주 52시간을 명시했지만 상당시간 처벌을 유예했다. 일부 언론과 야당이 ‘무리하게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노동편향 정부’라 매도했다고 문재인 정부가 ‘친노동 정부’는 아니다.

▲ 지난 2017년 4월4일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사진=문재인 캠프
▲ 지난 2017년 4월4일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사진=문재인 캠프

이런 현상은 노무현 정부 때도 경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인 2009년 3월24일 참모들과 대화에서 “우리가 진짜 무너진 핵심은 노동”이라며 실책을 반성했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관료들이 법인세 감세안을 밀어붙이는데 청와대·국회에서 방어해줄 사람이 없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색연필 들고 쫙 그어버렸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개혁방향을 세웠다면 이를 과감하게 실행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교사 삼을 법 한데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반정부 공세나 일본의 수출규제가 노동개혁 후퇴의 면죄부일 순 없다. 정부가 틈을 보이자, 야권은 진격했다.

▲ 조선일보 5일자 사설
▲ 조선일보 5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5일 ‘주52시간 때문에 핵발전소(원전) 건설 중단이 우려된다’고 보도했고, 이날 자유한국당은 “일괄적인 52시간 근로시간 규제 혁파, 탈원전 중단과 같은 근본적 처방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땜질식 처방으론 안 된다”며 주52시간 적용예외 확대, 법인세 인하,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등을 주문했다.

국제사회 기준에 맞지 않는 억지를 ‘근본적 처방’이라 주장하는 쪽도 문제지만 정부는 속속 받아들이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산자원부 장관은 5일 관계부처 합동 회의 브리핑에서 “화학물질 등 인허가 기간과 절차를 대폭 단축하고 조속한 연구개발을 위해 특별연장근로 인가와 재량근로제 활성화도 적극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의 인상률(2.9%)을 보인 내년 최저임금을 노동계 재심의 요청을 거부한 채 고시했다. 여당 의원들은 ‘주52시간 속도조절’ 법안도 발의한다.

국민일보는 지난 4일 노동부가 오는 9월 예정된 국내 최대규모 해외 취업박람회를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기업이 가장 많이 참여할 예정이다. 한국의 청년, 예비노동자가 피해를 입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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