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 상당수가 ‘무고’라는 속설이 잘못됐다는 연구 결과가 최초로 발표됐다. 무고죄로 고소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기소율은, 성폭력 피의자 기소율 대비 0.78% 수준으로 파악됐다.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연구원이 19일 공동 주최한 ‘성폭력 무고의 젠더분석과 성폭력 범죄 분류의 새로운 범주화’ 포럼(제117차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017~2018년 2년 간 검찰 처리 사건 중 죄명에 ‘무고’가 포함된 사건 목록에서 무고죄 단일범 사건을 추출한 뒤,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피의자인 사건을 뽑아내 분석한 결과(검찰 사건 처리 통계로 본 성폭력 무고 사건의 현황)를 발표했다. 이 기간 검찰의 성폭력 범죄 사건 피의자는 7만1740명, 이 중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는 0.78%에 해당하는 약 556명으로 추정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 고소 사건 중 실제로 유죄가 선고된 사례는 6.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가해자에 의한 무고 고소는 84.1%가 불기소 처분됐으며, 기소된 사건 중에서도 15.5%는 무죄가 선고됐다. 무고죄가 불기소 처분되는 경우를 유형별로 분석하면 혐의없음(증거불충분)이 69.8%로 가장 많았다.

▲ 19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성폭력 무고의 젠더분석과 성폭력 범죄 분류의 새로운 범주화’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19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성폭력 무고의 젠더분석과 성폭력 범죄 분류의 새로운 범주화’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피해자 지인의 경우도 부당한 무고 혐의를 받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무고죄 혐의를 받은 피해자 가족·친척은 56명, 이 가운데 53명이 가해자로부터 고소당한 경우였으며 52명이 불기소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 연구위원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 사건은 피해자에 대한 불신·비난에 더해 피해자가 수사 대상까지 되는 문제들로 이어지고 있다며, 성폭력 가해자가 무고·명예훼손을 ‘방어수단’으로 활용하는 건 강력하게 비난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성폭력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부추기는 일은 변호사 윤리에 어긋난다는 점이 명확히 인식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폭력범죄 유죄 선고 시 피고인의 무고 고소를 양형에 반영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는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성폭력 사건 종결시까지 성폭력 무고 사건 진행을 중단’하라고 권고했고, 대검찰청은 이에 따라 성폭력 수사 매뉴얼을 개정했다. 일각에선 이것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대검 성폭력 수사 매뉴얼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대검 수사 매뉴얼은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각하했다.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인 박은정 검사는 “피의자의 무죄추정 권리에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는 권리는 포함되지 않으며 실제 수사실무상에서 오히려 ‘무고의 무고’를 인지해 기소하는 사례가 많다. 또한 피해자 무고에 대해 무죄추정 원칙이 적용된다면 원 사건의 수사에서 실체가 밝혀진 다음 무고 수사가 진행돼야 하므로 더더욱 무고 수사가 중단돼야 하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이어 “법무부 대책위에서 이런 당연한 원칙을 권고한 이유는 그동안 어렵게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피해자가 역고소 당해 강제수사를 받는 피의자의 지위에 처함으로써 성폭력 고소 취소 압박을 받거나 무고 고소를 빌미로 피의자가 피해자에 2차 피해를 가하는 정도가 심각하기 때문”이라며 “피해자가 합의금을 요구했다는 사정만으로 ‘꽃뱀’으로 공격하는 우리 사회 인식수준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원칙을 선언적으로 명시하도록 했을 뿐”이라고 했다.

현행 한국의 성폭력 법령체계와 피해자 진술을 판단하는 구조 안에서의 간극도 지적됐다. 현행법상 성폭력 무고죄는 △폭행·협박이 없었음에도 허위로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간음 사실이 없음에도 허위로 간음했다고 주장하거나 간음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주장하는 경우 성립될 수 있다. ‘동의 없는 성관계’에 대한 피해자들의 신고가 이뤄지는 가운데, 폭행·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성범죄 피의자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무고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진전된 판례들도 나오고 있다. 대법원(2018도2614)은 최근 피해자를 주장하는 자가 성폭행 등 피해를 입었다고 신고한 사실에 대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되거나 무죄판결이 선고된 경우, 그 자체를 무고의 적극적 근거로 삼아 신고내용을 허위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 심리를 할 때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2018도7709)고 판시한 바도 있다

박 검사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개별 사건에 따라 다른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고, 설사 피해자 저항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허위 주장에 이를 정도의 무고가 성립하기까지는 매우 엄격한 판단기준이 필요하다”며 “성폭력사건이 불기소되거나 무죄가 선고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피해자의 피해진술이 무고라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하며 최근 대법원 판례는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준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짚었다.

한편 박 검사는 이날 “성폭력 무고 사건 분석은 한국역사상 최초인 거 같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행사를 주최해줘 감사드리고 한국사회 제1호 미투 당사자인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을 모시고 무고 사건을 분석하고 발표하게 돼 굉장히 뜻깊다고 생각한다”고 전한 뒤 “개인적으로는 1987년 가해자를 불기소처분했던 검찰이 권 원장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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