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영화의 인기가 한국에서 수그러들 기세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 시작은 지난 4월에 개봉한 ‘어벤져스 :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이었다. 한국에서 마블의 히어로 영화는 대체적으로 흥행이 좋은 편이었지만 ‘어벤져스’ 시리즈는 각각의 작품에서 인기를 모은 히어로들이 총출동하며 이미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엔드게임’은 약 10년 이상 전개된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에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차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엔드게임’의 한국 개봉일이 확정되자 한국 영화들은 일찌감치 ‘엔드게임’을 피해 개봉일을 잡았다. ‘엔드게임’이 개봉한 다음 날에 개봉한 ‘뽀로로 극장판 보물섬 대모험’ 같은 어린이-가족 영화를 제외하면, 그 어떤 영화도 ‘엔드게임’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이다.

누가 ‘엔드게임’이 극장에서 내려간 뒤에도 디즈니의 위력이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했을까. ‘엔드게임’이 장장 20일 동안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디즈니는 다시 1992년에 제작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한 ‘알라딘’으로 다시 1위를 차지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이라는 낭보를 받고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배급)이 곧바로 1위 자리를 물려 받았지만 ‘기생충’의 1위는 ‘엔드게임’보다 짧은 14일 동안 유지됐다. 6월20일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4’가 1위를 차지하더니, 곧바로 개봉 한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있던 ‘알라딘’이 다시 1위로 치솟았다. 곧이어 직접적으로 디즈니가 배급한 영화는 아니지만 마블코믹스의 판권을 이용해 소니픽쳐스가 만든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7월19일 현재 여러 혹평에도 불구하고 디즈니의 또 다른 자사 애니메이션 리메이크 ‘라이온 킹’이 1위를 차지했다.

‘어벤져스’가 극장에서 점차 사라지는 와중에서도 한국 영화는 ‘기생충’이나 ‘뽀로로 극장판’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는 것에 실패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라이온 킹’이 개봉한 7월17일 박스오피스의 모습이다. 1위부터 5위까지를 모두 해외 영화가 차지했으며, 이중 1위 ‘라이온 킹’, 3위 ‘알라딘’, 4위 ‘토이 스토리 4’는 전부 월트디즈니코리아가 수입-배급했다. 지난 7월10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진범’(리틀빅픽쳐스 배급)과 ‘기방도령’(판씨네마 배급)이 각각 6위와 7위에 머무는 가운데, 곧 개봉한지 두 달 째를 맞이하는 ‘기생충’이 한국 영화 중에서는 가장 높은 5위에 등극했다.

▲영화 '알라딘' 포스터.
▲영화 '알라딘' 포스터.

마치 1990년대, 한국 영화가 일부 유명 감독이나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제외하면 맥을 못추고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상위권을 차지했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한 광경이다.

물론 이 박스오피스의 모습은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수도 있다. 7월24일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재로 한 송강호, 박해일, 故 전미선 주연의 ‘나랏말싸미’(메가박스중앙 배급)가, 7월31에는 오컬트 스릴러 ‘사자’(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와 재난 탈출 액션 ‘엑시트’(CJ엔터테인먼트 배급)가 개봉한다. 애시당초 ‘진범’과 ‘기방도령’이 모두 대형 영화사가 아니라 중소규모 영화사가 배급한 것을 생각하면 ‘엔드게임’에 이어 대형 영화사들은 다시 한 번 디즈니의 영화를 피해 자신들의 블록버스터 규모 영화를 배급하는 길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을 감안해도, 한국 영화사의 움직임은 결국 한국 영화가 점차 ‘디즈니’라는 존재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영화의 흥행이 점차 약화되거나, 천만 관객을 넘긴 일부 영화에 쏠리는 현상은 201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보이더니 2018년부터는 매우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상황이 되었다. 2018년 추석에는 긴 휴가철을 노리고 5편의 한국 영화가 맞붙었지만 (‘물괴’, ‘명당’, ‘협상’, ‘안시성’, ‘원더풀 고스트’) ‘안시성’이 가까스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흥행이 실패했다. 같은 해 연말 시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4편의 한국 영화가 개봉했지만 (‘마약왕’, ‘스윙키즈’, ‘PMC : 더 벙커’,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2’) 추석과 달리 모든 작품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이 해 추석에는 헐리우드 직배사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으며, 연말 박스오피스의 승자는 워너브러더스의 히어로 영화 ‘아쿠아맨’이었다. 게다가 추석과 연말 사이에 20세기폭스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하면, 작년 하반기 한국 박스오피스를 추동했던 작품 상당수는 헐리우드 직배사의 영화였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영화계 대다수가 주장하는 대로 스크린 독과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점차 밀려나게 되는 걸까. 그러나 작년 추석 시즌 ‘안시성’은 1300여개 스크린을, ‘협상’과 ‘명당’은 900여개 스크린, 연말에 개봉한 ‘마약왕’과 ‘PMC : 더 벙커’는 각각 1300여개와 1000여개 스크린으로 상당한 규모의 상영관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이 녹록치 않았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스크린 독과점으로만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접근이다.

지금 현재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어떤 의미로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점차 기피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기생충’ 정도를 제외하면 지난 5-7월 사이에 개봉한 한국 영화 상당수는 혹평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지난 6월 메가박스중앙을 통해 개봉한 ‘롱 리브 더 킹 : 목포영웅’의 경우 2000년대 조폭 코미디의 단순 재현이라는 심각한 수준의 비판을 받았다. 감독부터 등장 배우 상당수가 2017년 깜짝 흥행을 기록한 ‘범죄도시’ 출신이었지만, ‘롱 리브 더 킹’은 688만 관객을 기록한 ‘범죄도시’의 1/6 수준인 109만 관객을 모으는 것에 그쳤다.

한국 대중 영화가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정체 상태에 놓이거나 혹평을 받는 동안, 해외 영화들은 꾸준히 이어온 변화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한국 관객들에게 제대로 어필하는 것에 성공했다. 특히 디즈니는 최근 개봉한 영화들이 영화 내적 연출은 물론 외적인 요소와 융합된 지점이 주목을 받았다. 여성 히어로의 모습을 고민한 ‘캡틴 마블’, 1992년 당시에도 파격적인 캐릭터였던 ‘자스민 공주’의 속성을 다시 한 번 재해석을 시도한 ‘알라딘’, 오랜 시간 이어져온 시리즈의 후속편이자 등장인물의 다양한 특성을 다채롭게 드러내는 해석으로 주목받은 ‘토이 스토리 4’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롱 리브 더 킹’이 낡고 오래된 구성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영화 '롱 리브 더 킹'의 한 장면.
▲영화 '롱 리브 더 킹'의 한 장면.

이러한 한국 상업 영화의 질적 저하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1986년까지 한국은 단 20개 회사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영화법이 개정되며 제한은 풀렸지만, 그 기간 동안 20개 회사 안에 들어 성장한 합동영화나 태흥영화 같은 토착 영화 자본의 위세는 한동안 강력했다. 그러나 이들 영화사는 전문적인 프로듀서 체제가 아니라 영화사 대표의 주관적인 선택에 따라 영화가 제작되는 한계가 있었고, 1990년대 속속 미국이나 일본 같이 전문 프로듀서 체제를 고민하던 신진 영화인들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기획 단계를 거쳐 영화를 제작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원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본이 없었고, 마침 비디오 시장의 확대와 함께 영상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이나 대우, SKC와 같은 대형 자본과 이해가 맞아 떨어지며 신진 영화인들은 대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이후 IMF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대기업이 사업 축소와 함께 영상 산업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투자하고 강제규가 연출한 블록버스터 ‘쉬리’가 흥행에 성공하는 등 한동안 대형 블록버스터는 한국 영화의 미래로 여겨졌다. 그러나 ‘쉬리’의 성공을 틈타 또 다른 성공을 꿈꾸던 한국 블록버스터는 2001-2002년 대다수의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 영화계는 침체기에 빠졌다. 무주공산이 된 가운데 오리온그룹 계열의 쇼박스나 CJ엔터테인먼트가 점차 한국 영화에 두각을 드러냈다. 동시에 창업투자사나 벤처캐피털을 비롯한 금융 자본이 한국 영화 제작 자본의 주류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2000년대 중반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는 봉준호, 박찬욱, 류승완, 김지운, 최동훈 등 2010년대 현재에도 한국 영화를 상징하는 감독의 작품에 투자-배급을 시도하며 자본적으로도 안착하는 것은 물론 작품성 있는 감독을 발굴한다는 찬사를 한동안 들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무척이나 양면적인 속성을 지닌 결과였다. 합동영화를 비롯한 기존 토착 자본이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퇴락할 때, 강우석과 심재명-강제규는 각각 ‘시네마서비스’와 ‘MK픽쳐스’로 자신들이 새롭게 중심에 서고자 했지만 그러기에는 자본은 턱 없이 부족했고 전도유망한 감독들은 이미 자신들의 한 때 파트너였던 대기업들이 전부 확보한지 오래였다. 그로 인한 흥행 실패가 꾸준히 이어진 결과 시네마서비스는 CJ엔터테인먼트에 매각되었으며,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의 결합으로 주목받았던 MK픽쳐스 역시 다시 분리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새로운 감독들은 대형 자본의 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후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의 타격을 한국도 맞게 되며 기존 중소규모 영화사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 영화의 중심은 CJ와 쇼박스, 그리고 롯데를 비롯한 대형 자본으로 완벽하게 쏠리게 되었다. 동시에 이미 블록버스터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마블, 워너-DC가 추진하던 히어로 영화의 물결에 큰 부담 없이 합류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사, 헐리우드 직배사 할 것 없이 최대한 빠르게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상영관수를 남들보다 많이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한국 영화는 기본적으로 블록버스터 영화가 쉽게 살아남는 환경이 되었다. 가끔씩 ‘보헤미안 랩소디’나 ‘리틀 포레스트’(2018) 같은 작품이 흥행하기는 하지만, 이는 각각 ‘중년 음악팬’과 ‘20-30대 여성 관객’이라는 특정한 관객층에게 어필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은 독립-예술영화라 해서 다르지 않다. 최근 1만 명 이상 관객을 기록한 한국 독립-예술영화 다수는 5,18을 다룬 ‘김군’이나 용산 참사를 다룬 ‘공동정범’처럼 역사문제를 다루거나, ‘무현 : 두 도시 이야기’나 ‘노무현입니다’처럼 노무현과 관련된 요소를 주제로 삼는다. 아니면 ‘B급 며느리’ 같은 여성-페미니즘, ‘칠곡 가시나들’ 같은 노인 문제, 아니면 종교적인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짚는 ‘무문관’이나 ‘교회 오빠’ 같이 특정 이슈를 소재로 지닌 작품 정도가 손익분기점 돌파에 상관없이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요소가 거의 없는 작품들은 1만은커녕 5천명을 넘는 것도 버거운 환경이 되었다. 동시에 똑같이 적은 수준의 스크린수와 상영회수라도 해외에서 건너온 예술 영화가 쉽게 1만명을 넘는 상황이 도래했다.

▲영화 '공동정범' 포스터.
▲영화 '공동정범' 포스터.

이런 상황을 그저 ‘독과점 해소’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블록버스터 이외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점차 주는 가운데, 블록버스터를 무기로 확장했던 한국 영화는 정말 작정하고 관객을 끌어 모으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도 혁신에 점차 실패하며 해외 영화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으며, 일찌감치 봉준호 같은 유명 감독이나 CGV아트하우스 등을 통해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지닌 CJ 등의 영화사가 선방하고 있다.

해외 역시 블록버스터가 압도적으로 흥행하는 현상이나 블록버스터가 가장 많은 스크린수를 차지하는 상황 자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해외는 블록버스터 외의 작품들을 보기를 원하는, 적극적으로 저예산 영화나 장르 영화, 독립-예술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폭이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동시에 지역 공동체 속에서 함께 자급자족하고 순환하는 ‘커뮤니티 씨어터’도 마을 운동과 더불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한국 영화가 점차 퇴행하고 찾는 관객들이 주는 현상은 결국 문화와 향유의 문제이다. 한국 영화는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는 것은 성공했지만, 몸집을 단단하게 받칠 생태계의 형성에는 실패했다. 동시에 지속적인 혁신도 무척이나 더디며, 과거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 또한 잦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제작-개봉되는 상업-독립영화의 수는 늘어나지만, 생태계가 부실한 상황에서 작품 수만 늘어난다고 능사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나 노인, 종교처럼 확실한 결집 요소가 있는 작품에 대한 흥행 성공 사례가 증가하고 주목받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부족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국의 영화 지원 기관인 BFI(영국영화위원회)는 2010년대 이후 ‘Film Club’(필름 클럽)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기초 교육 차원에서 영화 감상-이해 교육을 펼치고 있으며, 프랑스나 독일 역시 ‘청소년 영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청소년들이 다양한 영화를 접하며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전국에 있는 마을 공동체 단위의 극장인 ‘커뮤니티 씨어터’들의 연합체인 ‘일본커뮤니티씨어터센터’가 영화 상영을 넘어 일상적인 영화 교육 활동을 시도한다.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변화도 몸집 키우기나 ‘천만 영화’에 천착하는 길이 아니라, 일상적이며 다양한 영화 향유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만드는 움직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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