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명의 사람이 죽었지만 처벌받은 자는 없었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삭제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그곳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유’라는 문장을 완성시키기 위해 쓰인다. 인도네시아에서 300만명의 공산당원과 민간인을 학살한 집단의 이름은 실제로도 ‘프리만(freeman)’이었다. 

8년 전 거대한 조선소 안, 지워진 죽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그 날을 추석을 쇠고 온 다음날이었다고 기억했다. 족장일(선박의 블록 내외부에 발판, 난간을 만드는 일)을 하던 나이든 하청노동자 한 사람이 미끄러져 추락사했다. 같은 배에서 매일 보고, 웃고, 인사하던 이였다. 죽음은 신속하게 치워졌고, 회사는 그 자리에 바로 사람을 배치해 일을 시켰다. 작업복도 충분치 않아 땀에 젖은 옷이 삭아서 엉덩이가 다 보이는데도, 일 년에 한 켤레 제공되는 안전화의 바닥이 닳아 족장일을 할 때 수도 없이 발이 미끄러지면서도 해고될까봐 일을 멈추지 못했던 그는, 수만 번 발을 미끄러지면서도 천운으로 살았지만 수만 한 번째 목숨을 잃었다. 예고된 죽음이었다.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그녀는 자신들의 신세에 대해 “불쌍하다”고 표현했다. 

“하청사람이 죽으면 이건 개죽음이에요. 누가 신경 쓰겠어요.”

그녀는 이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존재에 대해 두 번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 처벌받은 자 역시 아무도 없었다. 

예고된 죽음

고(故) 김태규씨는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한 아파트형 공장 신축 건설현장에서 지난 4월10일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일한지 3일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도구라고는 현장에서 주워다 쓴 안전모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건설직 일용 노동자들은 안전화, 안전모, 안전벨트 등의 안전장비를 회사로부터 지급받지 못해왔다. 몇 년간 같은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었고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현장은 개선되지 않았다. 국가도, 기업도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2019년 4월10일, 그가 세상을 떠났다.

김태규씨가 사망하고, 회사는 유가족에게 전화해 ‘안전교육필증’만을 찾았다. 안전을 위한 기본적인 절차마저도 지키지 않은 회사에게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절차상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는 것이 더 우선이었던 것이다.

“안정망이랑 안전대, 그런 거 하나도 없었어요. 올라가면서 저도 어지럽더라구요. 거기는 누가 일을 했어도 그냥 죽으라고 하는 장소였어요.” 

▲ 김종훈 민중당 의원과 고(故) 김태규 씨 유가족, 청년 건설노동자들이 5월20일 국회 정론관에서 ‘고 김태규 산재사망 진상규명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김종훈 민중당 의원과 고(故) 김태규 씨 유가족, 청년 건설노동자들이 5월20일 국회 정론관에서 ‘고 김태규 산재사망 진상규명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고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는 동생을 보내고 나흘 뒤에 사망 현장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경찰은 건설사 말만을 듣고 동생의 죽음을 과실로 인한 실족사로 단정지었다. 그녀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할 의지가 없는 국가와 행정부에 분노와 무력감을 번갈아 느끼고 있었다. 현장은 전혀 보존되어있지 않았고, 5층에 있던 사고 엘리베이터는 1층으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아직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고용노동부는 5월16일 가족들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공사현장의 작업중지명령을 해제했다. 그녀는 동생의 사망 현장이 매일매일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비가 내리기만을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의 도시계획에 따라 수많은 건물들이 오르고 있다. 몇 달 만에 비어있던 자리에 높은 건물이 우뚝 솟아오른다. 거짓 말같은 광경이다. 건물 하나가 오를 때마다 수십 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친다. 고(故) 김용균씨 사망 후에도 하청노동자들은 이 현장들의 어딘가에서 죽어갔다. 신도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승강기 수리 현장에서,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건설 폐기물 처리 공장에서… 최저가 낙찰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사비에 포함된 안전관리비도 쓰지 않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발생시키며, 이는 당연하게 건물 하나가 오를 때마다 수십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동생의 죽음 후 이 모든 구조를 알게 된 그녀는 공사장의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저희 집 뒤에 오피스텔이 하나 지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헬멧 안 쓰고 일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헬멧 쓰시라고 막 소리지르고 그래요. 헬멧 왜 안 쓰고 일하시냐고. 그 사람들한테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겠지만. 하아, 이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 같아요.”

사회가 용인한 학살

200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유해위험작업에 대한 하도급업체 근로자 보호강화 방안’ 조사 보고서에서, 하청을 주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원청의 40.8%가 ‘유해위험작업이어서’라고 답했다. 두 번째로 많은 답변은 ‘임금수준이 낮아서’였다. 또한 도급 시설설비에 위험이 발생하는 경우 1차적인 조치는 누가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원청의 68.6%가 하청이, 하청의 16.3%가 하청노동자가 해야 한다고 답했다. 원청에서는 하청으로의 책임을, 하청업주는 하청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원청은 유해위험작업으로 인한 사망‧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비용을 절감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이 보고서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 ‘의도’에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원청 기업들은 일용직‧하청노동자들에게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신발을 주며 일용직‧하청노동자를 고공으로 올려 보내고 있다. 

이처럼 낮은 임금을 받으며 유해위험작업에 내몰려 죽거나 다친 수많은 일용직‧하청노동자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마저 고스란히 떠안게 만드는 것이 이 사회의 명징한 구조다. 2016년 경기도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 사상자 14명은 모두 일용직 노동자였다. 죽음은 계획된 것이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후, 문재인 정부는 ‘김용균법’이라 이름붙인 산업안전보건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했던 “생명과 안전을 이익보다 중시하는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유해위험작업 현장의 도급을 제한하겠다던 말과는 달리, 고 김용균씨가 일했던 전기사업설비 관련 업장은 외주화 금지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법안은 시행령에 적용제외라는 무수한 구멍을 두어 사실상 껍데기뿐인 법안이다. ‘이익이 생명과 안전보다 중시되는’ ‘죽음의 외주화’를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 고(故) 김용균씨는 생전 ‘문재인 대통령과 비정규직 100인의 대화’에 참가하기 위해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손팻말에는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는 문구도 적혔다. 사진=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 고(故) 김용균씨는 생전 ‘문재인 대통령과 비정규직 100인의 대화’에 참가하기 위해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손팻말에는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는 문구도 적혔다. 사진=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자유란 무엇인가

김도현씨는 최근 동생이 죽은 자리를 다시 찾았다가 사측에게 조롱을 당했다. 2016년 산재 통계에서 기업이 노동자 사망사고로 낸 벌금은 평균 432만원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년간 산재사망사고가 일어난 사업장 책임자 중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단 0.5%였다. 그들이 유가족을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정확히 알고 있다. 이처럼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큰소리를 치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는 사회 자체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수백명을 자기 손으로 죽인 학살자 중 한 사람은 “화해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모두 지난 일이잖아요. 네? 이렇게 흘러갈 얘기예요.”

가해자들은 역사를 자신의 입장에서 새로이 규정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린 그래도 됐어요. 그러니 사람을 죽이고도 처벌을 안 받았죠. 죽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해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기업의 무한자유를 보장하며, 노동자의 해고 위험을 고용유연화라고 포장하는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은 ‘자유’다. 그 ‘자유’란 이윤을 위해 죽거나 병들고 다칠 것을 알면서 사람을 그곳으로 몰아넣을 ‘자유’, 먹고 살 방법이 없는 노동자들을 해고할 자유, 노동자들의 모든 선택의 여지를 박탈할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권은 아직도 스스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호언하는 프리만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학살에 대한 책임을 방조하는 것은 학살의 또 다른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2001년부터 18년간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38,501명이었다. 2018년 중대재해 사망자 85%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었고,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고 김용균씨가 사망한 후, 2018년 12월 16일부터 2019년 5월 7일까지 50명의 일용직·하청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열흘 전에는 부산에서 홀로 승강기를 수리하던 20대 노동자가 사망했다. 올해 들어 부산에서만 아파트 승강기를 고치다 5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2019년, 정부는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 죽음들에 대한 책임을 방조하기로 했다. 사회가 용인한 이 기가 막힌 영화 속 학살의 장소는 다름아닌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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