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생 시절 언론사의 조직 문화는 위계적이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언론사에선 누구에게든 ‘님’자를 빼고 부르는 문화가 있고, 그건 알 권리를 가진 독자를 대변해 누구 앞에서든 주눅 들지 말라는 취지라고 들었다. 선후배 사이 격의 없는 토론으로 논조를 정하고, 기사를 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기대가 깨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 만난 ‘멘토’(회사가 신입기자 교육 담당자를 이렇게 불렀다. 신입기자들이 붙이거나 쓰던 호칭은 아니다)는 출근 첫 주에 “너희 월급에 욕먹는 값이 들어있다”고 선수를 쳤다. 신입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직장이 이 사회에 드물 테니 그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필자가 1~3년차 기자로서 겪었던 황당한 경험들이 적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주민센터가 있는데도 굳이 내게 위임장을 써줘서 자신의 신분증을 재발급 받는 ‘사적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이 있었고, 취재원과의 음담패설에 크게 고무된 한 사람은 남자들끼리 모인 2차 술자리에서 돌아가며 야한 이야기를 하자며 동석한 후배기자들을 당혹케 했다. 다른 언론사에 이직한 첫 주, 부서에서 야근을 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한 선배 기자가 “나 OOO야”라고 했다. 누군지 모르던 내가 “누구라구요?”라고 하자 그 선배는 불호령을 내렸다. “넌 인마 누군데, 후배가 선배도 몰라봐!”
비슷한 경험은 업무에서도 이어졌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기사를 제출하면 부족한 점을 지적받는 게 아니라 “이럴 거면 잠을 자지 말고 일을 했어야지”라며 화를 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보수·진보·경제 매체와 방송과 신문 쪽을 모두 거치며 직접 겪고, 또 여러 동료들에게서 들었던 경험을 종합하면 업무 지시와 업무 분장을 감정적이지 않게 하는 능력이 부족한 ‘소통불능자’들이 많은 경우 리더를 맡고 있었다. 그런 소통불능자도 한국 사회 문화를 체득해 늘 후배에게만 감정적 표출을 한다.
한국 언론에 만연한 직장 내 괴롭힘은 단순히 소통불능자 개인의 인격 문제일까. 그렇다고 보긴 힘들다. 한국 언론사들엔 독특한 ‘입단식’이 공식적으로 존재했고,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그 입단식은 가혹한 수습교육이다. 수습기자들에게 밤 12시와 새벽 4~5시에 보고하게 하는 방식으로 잠을 재우지 않고, 불필요한 수준으로 취재 결과물을 지적하며 괴롭히는 짓을 국내 언론사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수십 년간 지속했다.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는 일선 경찰서 출입 기자들은 때론 전화로 누가 더 잘 갈구는지 경연하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나열한 모습들은 결코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물론 이런 괴롭힘도 나름 명분이 있었다. 수습이 기자로서 필요한 능력을 빠르게 습득하는 효과적 교육 방식이란 명분인데 하루 20시간 이상 강압적으로 일을 하면 그 어느 일인들 빠르게 익히지 않을까.
문제는 기자의 일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세상에 필요한 기사를 쓰려면 무엇을 취재하고, 어떤 메시지를 알려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데에 기존 언론사의 수습교육이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직장 내 위계와 괴롭힘 문제에 관심을 가지니, 취재를 맡은 영역에서도 늘 ‘그 직장은 어떤지’ 물었다. 직장마다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그건 ‘나에게 직접적으로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문제 발생의 핵심 요인이라는 점이다. 이 공통점을 뒤집어 보면 리더가 ‘괴롭힘’에 가까운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걸 제어할 만한 문화나 시스템이 직장 내에 부재한다는 의미다. 이렇다 보니 회사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괴롭힘을 시행하기도 한다.
대기업 A사에선 2011년 출산휴가 후 복직한 여성 직원을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하며 퇴사를 종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두산모트롤에선 2016년에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에게 하루 종일 벽을 보게 하는 가혹 행위를 하기도 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 별 문제가 아니고, 어떨 때엔 리더의 권한처럼 여겨지니 기업 차원에서도 이런 부끄러운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한다.
이런 문화를 바꿔보자는 시도로 만들어진 법이 지난 16일 시행된 직장괴롭힘 방지법이다. 시행 첫날 많은 언론들은 ‘무엇이 괴롭힘인지 기준이 애매하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괴로움’은 사람의 느낌에 속하니 각 상황마다 일관된 기준이 있기가 어렵다. 어쩌면 비정상적 접대 문화의 산물인 ‘김영란법’처럼, 이 법도 비정상적 괴롭힘 문화가 아예 없었다면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도 방향도 ‘괴롭힘의 기준’을 찾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괴롭힘 유형이 있는지, 얼마나 만연한지, 개인 삶과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괴롭힘을 막기 위한 직장 내 시스템과 문화를 어떻게 조성할 수 있는지 등을 취재하고, 때로는 대중의 관심과 소비자의 힘으로 괴롭힘을 방조하고 자행하는 기업들을 응징할 수 있도록 언론이 역할을 해야 한다.
괴롭힘은 어떤 경우에도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응분의 대가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누구의 월급에도 욕 값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