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신 한 교수가 지난 13일 태극기 집회에 연사로 나서 ‘일본은 과거사를 충분히 반성했다’고 역설하자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영상 댓글엔 “빨갱이 보다 차라리 일본 식민지가 낫다”는 막말이 달리기도 했다. 조선, 동아일보는 연일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1920~193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필명을 날리던 기자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검거됐다가 전향해 수많은 친일 행각을 벌였다. 이광수는 40년대 초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을 순회하며 친일 연설을 했고, 도쿄에 가 조선인 학생의 학병도 권유했다. 

해방 이후 이광수는 1949년 2월7일 서울 세검정 은신처에서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체포됐다. 이광수는 마포형무소에서 2주일 이상 밤을 새워 ‘나의 고백’을 썼다.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여기서 이광수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민족이 대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줌이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했다”고 자신의 친일동기를 밝혔다.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썼고 1919년 8월21일 상해에서 창간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지낸 청년 이광수는 어떻게 변절을 체화시켰을까. 

▲ 춘원(春園) 이광수
▲ 춘원(春園) 이광수

이광수의 변절은 잡지 ‘개벽’ 1922년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서른 때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3·1만세시위의 과격성을 비판하며 우리 민족을 무지몽매한 야만족에 비유했다. 파문이 커지자 ‘개벽’은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다음 호엔 ‘유식 유산자 측부터 반성하라’(김기전) 같은 반대 논설을 실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광수가 이듬해 1월부터 ‘민족적 경륜’이란 평론을 연재하면서 ‘식민지 자치론’을 제기하자 전국에서 격렬한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불었다. 이광수의 민족주의 담론은 반제국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를 바탕에 깐 지배 논리의 수용이었다. 이광수가 자발적 예속화에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한 근거에는 지배에 대한 열망이라는 ‘식민적 주체성’이 또아리 틀고 있다. 20년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40년대 황국적 애국심 사이엔 연속성이 있다. 전자엔 문명화를 통한 지배에 대한 열망이, 후자는 지배를 위한 종속이 담겼다. 

몇몇 학자들은 이광수의 친일은 이미 191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1910년대 이광수는 독립을 사실상 포기하고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동화주의적 실력양성론을 주창했다’고 본다. 이광수의 친일은 일본 근대화에 동경이 주된 원인이었다. 강자에 대한 동화 열망이 낳은 이광수의 친일은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이광수 사상에 이미 내재된 당연한 결과라는 거다. 

이광수는 1930년대 초반부터 이탈리아 파시즘에 호감을 보였고 공화국 로마보다는 로마제국에 관심이 컸다. 그의 머리 속 로마제국은 1940년대 일본 제국으로 환생했다. 

힘을 동경하는 지식인의 비루한 근성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본 정부의 만주 침공과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일본 내 비판적 지식인들은 금세 순응했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만주제국 건설에 자신들의 미래를 던져 스스로 참여했다. 

이광수는 세계 모든 나라에 등장한다. 

일본에 탐닉했던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그 출발을 이렇게 고백했다. “화가였던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일본 판화 한 장을 내게 줬다. 19세기 히로시게의 여백 없는 판화였다. 내 어린 시절 몸은 프랑스에 있었지만 마음은 거의 일본에 있었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레비 스트로스의 일본 탐닉은 비틀스와 레드 제플린이 동양을 소비한 것처럼 실체 없는 공상이었다. 레비 스트로스가 반세기 넘게 열정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태평양 선사시대 신화를 캐고 다녔지만 그의 서사는 역사시대를 통째로 무시한 반(反)과학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위대한 일본은 제국주의 일본 부활에 몰두하는 오늘날 일본 정치가들의 망상에 너무 자주 이용당하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루소의 소설 ‘신(新) 엘로이즈’와 일본 소설 ‘겐지 이야기’의 닮은 점에서 출발해 “프랑스와 일본은 같은 심리를 갖고 있다”고 단정하거나 “고대 일본이 유럽과 태평양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했다”는 비약으로 발전한다. 

1940년 9월 독일군이 침략하자 곧바로 항복해 나라 전체가 나치 협력으로 간 덴마크는 덕분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심지어 나치와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농산물과 식량을 독일로 수출해 경제 사정도 폈다. 그러나 덴마크 국민은 저항을 택했다. 

전쟁 직후 덴마크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나치 가담자 처벌은 프랑스 보다 강력했다. 공소시효도 없었다. 네덜란드는 폐지했던 사형제도까지 부활 시켜 처벌했다. 

이미 70년 전에 끝난 나치 또는 친나치 정권의 목소리가 이 땅에 뒤늦게 울려 퍼지고 있다. 90여년 전 기자 이광수가 자치론을 주창했던 그 신문이 지금도 비슷한 논리로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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