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작품을 고른다면 어떤 걸 들까. 모두들 저마다 다양한 작품을 제시하겠지만, 결코 ‘며느라기’를 빼고 2010년대 후반 한국 만화를 논할 수 없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수직적인 가족 문화와 결코 평등하지 않은 남녀의 관계에서 신혼을 맞이한 부부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와 심리적인 갈등을 포착한 수작이었다. 동시에 네이버 웹툰이나 레진코믹스를 비롯한 웹툰 전문 플랫폼이 아니라, 작품을 위해 별도로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된 작품은 SNS 특유의 정사각형 모양의 칸을 최대한 살리며, SNS가 지니는 사적이고 내밀한 속성까지 모두 연출에 녹아내며 독자는 물론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그 결과 ‘며느라기’는 작품의 가치에 걸맞은 성과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며느라기’는 2017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며 1999년 상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단 한 번도 출판사를 통해 연재, 출간되거나 웹툰 플랫폼을 통해 공개된 적이 없는 만화가 상을 받은 기록을 만들었다. 2018년에는 여성신문이 주관하는 ‘2018년 올해의 성평등문화상’에서 창의적인 문화 활동을 한 콘텐츠 제작자에게 수여하는 ‘청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작가와 작가의 연인인 디자이너 이근백이 함께 만든 독립출판사 ‘귤프레스’로 출간된 단행본도 정사각형의 컷을 살린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편집 디자인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만화 추석 특별편 중 한 컷. 사진출처=며느라기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in4rin/)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만화 추석 특별편 중 한 컷. 사진출처=며느라기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in4rin/)

작가 자신의 ‘며느라기’ 작업을 정리, 회고한 기록을 모은 ‘노땡큐 : 며느라기 코멘터리’를 제외하면 한동안 작품 활동을 잠시 쉰 수신지 작가는 지난 5월 6일부터 ‘곤’(GONE)이라는 제목의 신작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 플랫폼은 전작 ‘며느라기’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 전용으로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와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2019년 상반기 화제가 되었던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약 낙태죄가 다시 한 번 합헌 판정을 받고 더 나아가 정부가 더욱 확실한 낙태죄 처벌을 위해 과거의 낙태 기록까지 잡아낼 수 있는 조사 기구를 마련했다는 SF적인 설정까지 가미된 작품은 ‘며느라기’에 이어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매주 꾸준하게 연재를 이어나가던 ‘곤’은 지난 6월 25일 한 가지 중요한 공지사항을 발표했다. 기존 SNS 연재를 지속하는 동시에, ‘유료 미리보기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이야기였다. 수신지 작가는 공지사항을 통해 부분 유료 연재를 시도하게 된 경위와 사정을 함께 설명했다. 동시에 그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도 함께 꺼냈다. ‘며느라기’가 SNS에 연재를 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연재할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플랫폼에서 거절당하고 이 만화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SNS를 통해 셀프연재”를 시작한 결과가 현재의 ‘며느라기’였다.

그러나 SNS를 통한 연재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신지 작가는 ‘며느라기’를 연재하는 동한 단 한 푼도 수입이 없었음을 밝혔다. “다행히도 단행본을 많이 구입”하여 “연재료와 맞먹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작가는 이러한 사례를 “특수”한 사례로 한정하며 결코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기는 쉽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딜리헙’이라는 오픈마켓 형태의 콘텐츠 플랫폼을 발견하여, 웹툰 플랫폼을 거치지 않더라도 연재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대체 ‘딜리헙’은 어떤 플랫폼일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공유 오피스에 본사 소재지를 둔 회사 ‘몬스터헤즈’가 운영하는 딜리헙은 작가가 자유롭게 자신이 만든 작품을 올리며 연재하고 판매도 할 수 있는 ‘오픈마켓’ 형태의 웹툰 플랫폼이다. 회사는 플랫폼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관리하거나 콘텐츠 판매 수익 정산, 작품 추천 등의 역할만 수행한다. 작품을 기획하며 연재하고, 홍보하는 역할은 모두 작가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마치 G마켓이나 옥션 같은 오픈마켓 시스템을 그대로 만화에도 가져온 셈이다.

▲수신지 작가의 신작 'GONE 곤'의 한 장면. 사진출처='GONE 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one.noh.family/)
▲수신지 작가의 신작 'GONE 곤'의 한 장면. 사진출처='GONE 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gone.noh.family/). 딜리헙(https://dillyhub.com/)에서도 연재를 볼 수 있다.  

딜리헙이 이런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아니다. 넓게 보자면 네이버 웹툰의 ‘도전 만화가’ 같은 아마추어 웹툰 게시 공간도 딜리헙과 비슷하며, 이전에 존재했던 웹툰 플랫폼인 ‘티테일’이나 ‘폭스툰’ 역시 딜리헙과 비슷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웹툰 플랫폼보다는 블로그에 더 가깝긴 하지만, 2015년 서비스를 시작한 ‘포스타입’ 또한 소설이나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등이 담긴 게시물을 유료로 판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며 이미 <킬 더 킹>의 마사토끼 작가를 비롯한 몇몇 창작자들이 애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화가 아닌 영역으로 보자면 소설에서는 ‘조아라’나 ‘문피아’, 음악에서는 ‘바이닐’이나 ‘밴드캠프’ 등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오픈마켓 시스템을 도입하여 다양한 창작자들을 끌어 당겼다.

하지만 딜리헙이 오픈마켓식 웹툰 시스템을 맨 처음으로 도입한 곳은 아닐지라도, 기존에 존재했던 비슷한 부류의 웹툰 플랫폼 중에서는 가장 유려하며 직관적인 디자인과 시스템을 갖춰 점차 많은 독자나 창작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2018년부터 게재된 고사리박사 작가가 그린 불교 세계관 바탕의 퇴마물 ‘극락왕생’이 큰 주목을 받으며 딜리헙은 순식간에 한국 만화계의 이슈 메이커가 되었다. 이제 자신의 작품을 더 멀리 공개하고 싶으면서도, 악성 댓글에 시달리지 않고, 유료 수익을 노려보고 싶은 작가들은 점차 딜리헙을 택하고 있다.

물론 딜리헙이 만능해결사가 될 수는 없다. 딜리헙이 플랫폼 관리, 수수료 정산, 작품 추천 기능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것을 작가에게 맡긴다는 이야기는 돌려 말하면 작품을 기획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멀리 퍼트리고, 꾸준히 연재를 이어나가기 위한 모든 공력과 책임을 작가가 지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모든 작품이 고르게 인기를 얻기 어려운 것처럼, 딜리헙에서 인기를 얻고 수익을 창출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작가가 스스로 창작자는 물론 편집자와 마케터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만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웹툰 플랫폼 상황을 잠시 돌이켜 생각해보자. 한국의 웹툰 플랫폼들은 얼마나 ‘편집자’의 기능을 수행하거나 작가의 창작 파트너로써 믿음직한 존재가 되고 있는가. 근래 기안84의 ‘복학왕’이 차별, 혐오적인 표현이 담겨져 있음에도 아무런 제지가 없이 그대로 연재되다 논란이 불거진 이후 겨우 수정했던 사건처럼, 한국의 웹툰 플랫폼은 제 때 작품이 업로드되었는지 이상으로 편집에 큰 공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웹툰 산업에서 가장 규모가 큰 네이버 웹툰도 작품 담당자의 수는 매주 연재되는 작품의 수에 비해 무척이나 적은 수준이다. 작품을 연재하고 끝나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선택이나 판단이 개입되지만, 이를 결정하는 기준을 작가들은 알기 어려우며 의견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갑작스럽게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생겨도 쉬기도 어렵고, 고료나 수익을 지급하는 기준도 대개 플랫폼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딜리헙은 분명 작가에게 많은 책임이 질 수 밖에 없는 구조지만, 사실 다른 웹툰 플랫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설적인 상황이다.

수신지 작가는 ‘곤’의 공지사항에서 “누군가 허락한 콘텐츠만이 세상이 나오는 시스템”에 의문을 가진 것이 정식 연재 제의에도 불구하고 SNS에 연재를 유지하게 된 이유라 밝혔다. 1990년대 잡지 만화의 전성기에도 사정은 좋지 않았지만, 웹툰이 대세가 된 지금에도 여전히 작가들은 불합리하며 불투명한 구조 안에서 작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수신지 작가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딜리헙으로 점차 연재처를 옮기는 선택은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현 웹툰 시스템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중대한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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