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연이틀 ‘한국 수출 규제 품목 중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쓰이는 물자가 있다’고 보도를 이어가는 가운데, 검증에 들어간 한국 언론들은 “명확한 근거없는 정치적 주장”이라 반박했다.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FNN)는 10일 한국 정부 문건을 근거로 “2015년부터 지난 3월까지 한국 기업이 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 156건을 (제3국으로) 밀수출해 한국 정부에 적발됐다”고 보도했다. FNN은 이중 수출 규제 품목인 불화수소(에칭가스)가도 아랍에미리트(UAE)로 불법 수출됐다고 강조했다.

▲11일 한겨레 2면
▲11일 한겨레 2면

 

일본 국영방송 NHK도 9일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 제조에 전용할 수 있는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하는 등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익명의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군사 전용 가능한 물자가 한국에서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하는 다른 나라에 넘어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이번 조처(수출규제)에 들어간 것”이라고 전했다.

한겨레는 일본 정부가 여론전을 위한 ‘사린 독가스 포비아’와 반북 정서 카드를 꺼냈다 분석했다. 특히 ‘사린가스’를 특정해 언급한 것은 수출규제 명분이 약하다는 논리를 상쇄할 의도적인 카드란 지적이다.

▲11일 중앙 6면
▲11일 중앙 6면
▲11일 중앙 6면
▲11일 중앙 6면

 

한겨레는 “불화수소가 사린 가스의 합성 원료로도 쓰일 수는 있지만 모든 이중 용도 물자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가 ‘사린 가스’라고 용도를 특정한 것”이라며 “일본 사회에서 사린 가스는 극도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물질”이라 평했다. 사린가스는 1990년대 일본 종교단체 옴진리교가 도쿄에 대량으로 살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독가스다.

중앙일보는 ‘후지TV가 억지를 쓴다’며 사실관계를 검증했다. NHK가 사린가스 원료라 지적한 ‘에칭가스’는 순도 99.99%인 ‘고순도’ 불화수소다. 중앙은 “불화수소를 생화학 무기 제조에 활용할 수 있고 일본 주장대로 핵무기 핵심인 고농축우라늄을 만드는 데도 쓰이지만 불화수소가 ‘고순도’ 불화수소란 데서 근거 없는 주장이란 얘기가 나온다”며 “국내 업체는 물론 중국 업체도 저순도 불화수소(순도 97% 안팎)를 만드는데 이 저순도 불화수소로도 충분히 생화학 무기나 고농축우라늄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은 즉 일본 측 주장은 ‘쉬운 길이 있는 데도 일부러 어려운 길로 돌아갔다는 얘기’라며 고가의 구하기도 어려운 일본산 고순도 불화수소를 굳이 구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중앙은 또 “불화수소를 화학무기 제조에 쓴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며 “수입 원료 중에서도 불화수소 같은 독성물질은 주문량·입고량을 완벽하게 대조하며 불화수소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국내 한 반도체 회사 관계자 말을 인용했다.

▲11일 한국 4면
▲11일 한국 4면

 

연이어 보도된 일본 언론 보도는 지난 5월17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대량 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데… 한국, 전략물자 불법수출 3년새 3배” 기사다. 조선은 당시 “미사일 탄두 가공과 우라늄 농축장비 등으로 전용(轉用)될 수 있는 국내 생산 전략물자가 최근 대량으로 불법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대량살상무기(WMD) 제조에 쓰일 수 있는 우리 전략물자가 제3국을 경유해 북한이나 이란 등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같은 논지를 폈다.

근거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받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이다. 2015년부터 지난 3월까지 정부 승인 없이 국내 기업이 생산해 불법 수출한 전략물자는 156건이고 적발건수는 2015년 14건에서 지난해 41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재래식 무기가 53건, 핵무기 관련이 29건, 미사일 무기가 2건, 화학 무기가 1건 등 생화학무기 계열 불법 수출이 가장 많이 적발됐다.

▲11일 조선 4면
▲11일 조선 4면
11일 조선 1면
11일 조선 1면

 

조선일보는 목록 중 '디이소프로필아민'을 들어 “북한 당국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암살하는 데 사용한 신경작용제 'VX'의 제조 물질”이라 강조했다. 조선은 이어 “북한과 우호 국가들에 불법 수출이 계속 늘고 있는데, 제3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양욱 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을 인용했다.

FNN 및 NHK가 인용한 자료와 논지가 조선 보도와 유사하다. 조선일보도 11일 “FNN이 입수했다는 자료는 우리공화당 조원진 의원실이 지난 5월 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인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조선일보는 이와 관련 산업통상자원부의 미흡한 관리에 책임을 물었다. 조선은 “정부가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에 포함시킨 불화수소의 불법 반출을 제대로 막지 못한 것도 문제인 데다, 일본이 불법 유출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할 때부터 '일본에서 수입된 전략물자'뿐 아니라 전략물자의 전반적 관리 실태를 명확히 밝혀 의혹 제기를 사전에 차단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중앙 논조는 조선일보와 상이하다. 중앙은 “아베와 측근들, 근거없는 ‘한국 때리기’와 제재 철회하라” 사설에서 “정부는 총리가 직접 나서 퍼뜨리고 있는 이 같은 일본발 ‘가짜 뉴스’들에 정공법으로 맞서야 한다”며 “한국이 화학무기 원료를 북한에 넘겼다 악성 루머를 방치하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에 큰 금이 가고, 미국의 중재 개입 여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북한 문제에서는 사실상 반론이나 비판이 어려운 일본 정서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읽힌다”며 “일본 언론들도 수출 규제 조처 초기엔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대항 조처라며 비판했지만 점차 안보상 필요를 강조하는 일본 정부의 발표를 따라가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11일 경향 1면
▲11일 경향 1면
▲11일 동아 사설
▲11일 동아 사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30개 기업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는 조치를 취하고, 아무런 근거 없이 대북 제재와 연결시키는 발언을 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와 안보협력 관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정부에 구체적 대응 방침과 외교적 돌파구 마련을 강력히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10일 사설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는 앞으로 2차, 3차 추가로 이어지면서 우리 경제를 옥죌 가능성이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재량권이 많은 수출 심사 규제를 쥐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할 공산도 크다”며 “국제사회에 일본의 부당함을 여론화하는 한편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일본이 자동차 등 산업 전반과 금융에까지 보복 조치를 확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정밀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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