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최근 국회 연설에서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며 “더이상 단일 기준으로 모든 근로 형태를 관리·조정할 수 없는 경제 시스템인 만큼 근로기준의 시대에서 계약자유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잡한 근로형태라는 바른 현실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대안은 퇴행이다. 

나경원 대표의 ‘노동자유계약법’을 듣고서 200년전 영국의 악명 높았던 ‘단결금지법’을 떠올렸다. 18세기말 영국 산업자본가들은 이웃 프랑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의회를 압박해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해 노조 결성 자체를 금지시켰다. 

19세기초 단결금지법이 시행된 영국의 노사관계는 나경원 대표가 주장하는 자유계약에 기초한 민법으로 규율됐다. 자유계약에 기초한 사회는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를 방조해 정상적 노동력 재생산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찰스 디킨스가 1837년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보여준 야만의 영국은 오롯이 자기 경험이 만든 작품이다. 찰스 디킨스는 12살에 파산한 아버지가 감옥에 가자 가족이 해체되고 구두약 공장에서 일했다. 그가 겪은 소년 노동은 훗날 유명작가 되고서도 트라우마처럼 따라 다녔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5년작 ‘올리버 트위스트’ 한 장면.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5년작 ‘올리버 트위스트’ 한 장면.

단결금지법은 10대 청소년을 하루 16시간씩 일 시키는 야만의 영국을 만들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사망률이 치솟자 영국 하원은 1933년 깜짝 놀라 청문회를 열고 ‘공장법’을 제정했다. 공장법이 오늘날 노동법의 기원이다. 

노동법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하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맺는 ‘자유’계약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노동법은 자유계약이 만들어 낸 기울어진 운동장을 일정하게 바로 잡는 법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노동자와 사용자 범위는 단순히 근로계약을 맺은 두 주체를 뛰어넘고 있다. 기업의 노동력 활용방식이 다양하게 변했다. 다양한 간접고용이 확대돼 사용자는 점차 뒤로 숨었다. 근로계약서를 써지 않고서도 사용종속 관계가 형성되는 특수고용직도 점차 늘고 있다. 기업이 계약의 형식을 넘어 자신의 비용과 위험을 노동자와 사회에 전가하면서부터 시작된 현재와 같은 ‘사용자 행불’을 해소하려면 근로계약 유무만 따지는 법을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19~20세기 공장식 집단노동을 규율하던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의 사용자, 노동자 정의는 더욱 확장돼야 한다. 

정부의 공식통계는 아예 없고, 연구자마다 100~500만명까지 추정치도 제각각인 특수고용직의 노동자 지위를 인정하고 숨은 사용자를 찾아줘야 한다. 다단계 간접고용 먹이사슬 아래 놓인 하청업체와 점주에게 오롯이 사용자 책임을 모두 전가한채 숨어서 이익만 챙기는 원청 사용자도 노동법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원청 사용자성을 부정하는 현행 노동법 체계는 노동자 단결권마저 부정해 이 나라를 200년전 단결금지법이 활개치던 야만의 영국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사람에게 교섭을 요구하면 불법이 되는 노동법으론 현재의 복잡한 노사관계를 포괄할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전통적 노사관계에서 배제된 수백만명의 노동자, 노동자로 부를 수도 없는 이들의 노동기본권을 찾아줘야 한다. 19세기 법으로 21세기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이 기막힌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정치권이 지금 당장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19세기 야만의 자유계약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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