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무부장 학교에서 평이 꽤 좋았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데?” 지난해 8월,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의혹이 불거진 직후 한 회사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학교 관계자들의 전언이 귀에 거슬렸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일이라면 평소 자신이 지향하던 정치적 올바름이나 도덕관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내로남불’ 부모들을 익숙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의혹을 제기한 ‘강남 엄마’들의 주장에도 귀가 기울여지진 않았다. 쌍둥이가 2학년 1학기 각각 인문·자연계열에서 전교 1등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시험지 유출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 강남 8학군 학부모들의 극성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9월 초 경찰 수사가 본격화된 뒤 나 역시 숙명여고 교무부장 부녀의 ‘유죄’를 확신하는 여론에 동조하게 됐다. 쌍둥이 딸의 집과 휴대전화에서 일부 과목의 정답과 시험문제 관련 메모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분노했고, 물증을 확보했으니 검찰에서도 이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다만,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경찰 수사과정에서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아무개(52)씨나 쌍둥이 딸의 해명이 보도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녀의 침묵은 혐의를 인정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유죄를 확신하는 여론재판에 모든 걸 체념한 결과일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남긴 채 현씨의 파면과 쌍둥이의 퇴학이 결정됐고,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 지난해 11월12일 오전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에서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관련 압수물이 보이고 있다.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의혹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전 교무부장이 쌍둥이 자녀들에게 문제와 정답을 유출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사진=노컷뉴스
▲ 지난해 11월12일 오전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에서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관련 압수물이 보이고 있다.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의혹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전 교무부장이 쌍둥이 자녀들에게 문제와 정답을 유출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사진=노컷뉴스
▲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에서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관련 압수물 내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에 해당 시험 문제의 정답이 순서대로 적혀있다. 사진=노컷뉴스
▲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에서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관련 압수물 내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에 해당 시험 문제의 정답이 순서대로 적혀있다. 사진=노컷뉴스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난 5월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 기소된 현씨에게 법원이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뒤였다. 1심 판결문과 검찰·변호인 의견서 등 각종 재판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사건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전 교무부장 현씨와 쌍둥이 딸이 왜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인지 기록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었다.    

[ 관련 기사 : 한겨레신문)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 법정 증거로 톺아보기 ]

결과는 예상 외였다. 현씨가 교무실 금고에서 시험지를 꺼냈다거나 이를 딸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을 입증할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심 법원이 문제 유출의 핵심 증거로 판단했던 ‘깨알메모’는 검찰 쪽 주장과 달리 실제 정답과 다른 경우가 확인됐고, ‘정정 전 정답’ 의혹 역시 쌍둥이가 3차례나 ‘정정 후 정답’을 써서 문제를 맞힌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핵심증거에 대한 의문들이 현씨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딸이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고득점을 얻은 물리1 시험지에 풀이과정이 부족한 점, 같은 기간 치른 화학1 서술형 문제에서 자연계열 218명 중 유일하게 ‘정정 전 정답’을 써낸 점 등 문제 유출을 의심할만한 정황 역시 다수다.

▲ 선담은 한겨레 기자
▲ 선담은 한겨레 기자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독자들은 “당신이 쌍둥이의 변호인이냐”며 보도를 비판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이 지면을 빌려 그 질문에 답변하고자 한다. 이번 취재를 함께 한 정환봉 선배와 나는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과 쌍둥이 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이 기사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다만, 우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의 1심 판결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형사재판의 대전제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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