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대학들이 밀집한 대표적인 대학가에서 3선을 한 국회의원의 발언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86세대 정치인 중에 한 사람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젊은 정치인의 국회 진입이 어려운 이유로 “과거 청년 발탁 사례를 성공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많다. 장하나·김광진 전 의원을 청년 비례로 데려왔는데, 청년 세대와 소통하는 게 아니라 자기 관심 있는 활동을 주로 했다. 그런 사람들을 세대 대표 경선을 해서 데려와야 하느냐를 두고 당내 이견이 있었다”고 답했다. 이런 시각이 새롭진 않다. ‘청년들의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는다’, ‘정치가 청년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기성세대의 반응은 비슷했다. “청년 국회의원이어야만 2030 민심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너희도 우리처럼 실력으로 쟁취해. 그냥 달라고 징징거리지 말고”.

조슈아 웡이란 홍콩의 젊은 활동가가 있다. 그는 열 다섯 살에 학민사조라는 학생단체를 만들어 중국 정부가 홍콩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국민 윤리교육 도입을 막아냈다. 열 여덟살엔 홍콩의 참정권 시위였던 우산혁명에 선두에 섰다. 당시 그는 또래 학생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이 문제를 결코 다음 세대에 넘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가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합니다.”

▲ 지난 6월18일 JTBC 뉴스룸 ‘‘우산혁명 주역’조슈아 웡 “한국 촛불혁명, 홍콩에 본보기”’ 갈무리. 사진=JTBC 유튜브
▲ 지난 6월18일 JTBC 뉴스룸 ‘‘우산혁명 주역’조슈아 웡 “한국 촛불혁명, 홍콩에 본보기”’ 갈무리. 사진=JTBC 유튜브

 

한국의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문제를 도외시하며 젊은 정치인 한두명에게 이 문제를 일임하는데 반해, 홍콩의 10대는 벌써부터 다음세대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지난달 29일 청년정치를 주제로 열린 ‘2030 한국사회 전환의 전략 공론장’에서 ‘지긋지긋한 꼰대정치를 끝장내자’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당초엔 ‘청년정치의 과소대표성의 현황과 대안’이란 온건한 제목을 달았으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점점 내면의 목소리가 끓어올라 ‘꼰대정치’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꼰대정치란 세대간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를 의미한다. 세대간 소통을 논하기 이전에 정치의 본질부터 따져보자.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반해, 정치는 다른 사람을 대변해야 하는 일이다. 정치란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일이고, 그 극복의 수단은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정치가 가능하다. 한국 정치의 총체적 위기는 정치인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한국 정치인들의 전문성, 학습능력, 눈치, 체력 모두 수준급이나,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좁은 사람들이 다수라는 점이 진짜 문제다. 왜 유모차를 밀거나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이리도 힘든가는 정치인 다수에게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 자신의 문제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권의 구성이 균질적이어선 안 되고, 이미 구성된 정치집단은 늘 자기 존재를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계층, 지역, 성별 등의 분야도 경계를 뛰어넘어 소통하기가 어렵지만, 한국에선 특히 나이에 따른 위계문화가 세대간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세대 간 인식차는 커지고,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관도 달라진다. 한국의 기성정치인들은 여전히 일자리가 많았고, 한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해 지금의 청년층을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대기업, 공무원에 목매지 말고 인력난이라는 중소기업에 취직해라’는 조언을 건네는 정치인은 자신이 어디에서 세상을 보고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80세에 육박한 버니 샌더스가 젊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이유는 그가 젊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 버니 샌더스 (Bernie Sanders)
▲ 버니 샌더스 (Bernie Sanders)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금 이 시점에 ‘청년정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다시금 정치권에서 ‘청년’이란 용어가 대두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청년정치의 목적은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세대간 문제를 극복한 이후에 보다 세밀하게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하는 사회가 되도록 정치가 역할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꼰대정치를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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