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들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범준(46) 경향신문 사법전문기자는 반어법으로 말했다. 지난 6월25일 그가 쓴 칼럼 제목이다. 기사는 그가 지난해 8월부터 연속보도한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 탐사물이다. 이 보도를 계기로 수사가 진행돼 지난달 1심 선고까지 났다. 보람을 느껴야 할 기자가 왜 후회했을까.

이 기자는 사건 결과를 두고 ‘부조리 그 자체’라 말했다. 사건 공익제보자는 선고 당일 징역 2년 실형을 받고 구속됐다. 입찰 비리 업체에서 일했던 전력이 있었다. 비리를 주도한 전직 법원 공무원 등 나머지 14명도 유죄가 선고됐다. 횡령, 뇌물 및 뇌물공여, 공무상비밀누설, 입찰방해 등 다양한 범죄로 엮인 이 사건은 입찰 비리 금액만 1293억5175만원으로 최소 10년 넘게 지속된 대규모 범죄다. 이들을 지휘·감독한 상사도 책임을 지는 게 상식이다.

1년이 흘렀으나 책임진 상급자는 없다.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고 법원 내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사건에 연루된 상급자들은 14명, 모두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 국장이나 심의관을 지낸 ‘판사’들이다. 이들 아래 과장 이하 실무자와 업체 관계자만 처벌되고 끝났다.

▲이범준 경향신문 기자. 사진=박소영 대학생기자
▲이범준 경향신문 기자. 사진=박소영 대학생기자
▲경향신문 6월26일자 이범준 기자 칼럼
▲경향신문 6월26일자 이범준 기자 칼럼

 

이 기자는 사건을 지난해 8월13일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 제목의 기사로 첫 보도했다. 그해 6월 제보자를 만난 이 기자는 2달여 간 검증 취재를 거쳐 2007년 퇴직한 법원행정처 공무원 A씨가 2009년부터 지금까지 가족 회 사를 통해 법원행정처와 최소 243억원 물품·용역 계약을 맺어 온 것을 확인했다. 10월엔 대법원이 추진하는 전자법정에 시중가의 10배가 넘는 비합리적인 가격의 설비나 이례적인 사양의 기기가 공급된 사실도 확인했다. 논란이 지속되자 대법원은 감사에 착수했지만 ‘과장’ 선에서 꼬리가 끊겼고 판사들은 징계 대상에서 제외됐다. “전산장비 사업 특성상 비전문가인 판사에게 감독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이유다.

사건에서 드러난 도덕적 해이 수준은 놀랍다. 전산정보관리국 정보화지원과장 B씨는 2014년부터 보도 전까지 A씨로부터 뇌물 3억5900여만원을 받았다. 사이버안전과장 C씨는 2014~2017년 간 A씨에게 2억5700여만원을 수수했다. 뇌물을 받은 법원행정처 공무원은 총 4명으로 A씨는 뇌물에만 6억9000여만원을 썼다.

공무원이 제공한 대가는 ‘공무비밀누설’과 ‘입찰방해’다. 사업 발주 때마다 입찰에 참여한 경쟁업체 제안서와 법원 내부 제안서 검토보고서 등을 A씨 측에 제공했다. A씨 관계업체만 참여할 수 있도록 특정한 입찰 조건을 걸기도 했다. 예로 납품단가 350만원 상당의 실물화상기 ‘VZ-8neo’의 특정 사양을 입찰제안서에 기재해 해당 업체만 수주하도록 했다.

이들은 2013년 법원 사업 수주를 원하는 업체 대표와 A씨를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사업을 수주하면 사업 수익 50%나 수주 사업 일부를 A씨 업체에 하도급 준다’는 게 조건이었고 실제로 이 업체가 수주해 대금 50%가 A씨 업체로 지급됐다. 공무원들은 이 과정에서 법원 내부 자료를 빼돌려 업체 대표에게 줬고 입찰 제안서 작성까지 도왔다. 이렇게 누적된 입찰비리 규모가 1293억원 가량이다.

검찰수사는 보도가 다룬 2013년부터로 한정됐다. 이 기자는 “일부분일 뿐 정황상 2000년부터 입찰 비리가 이어졌을 거라 추정된다”고 말했다. A씨 업체의 전신격인 업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행정처 공무원들이 만든 이 회사는 2000년 설립 후부터 수의계약으로 대법원 사업을 따냈다. 2008년 정기국회에서 수의계약 문제가 지적되자 2009년부턴 A씨 업체가 경쟁입찰을 거쳐 계약을 따냈다. A씨도 2000년 설립된 전신 회사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대법원은 보도 당시 허위해명으로 일관했다. “문제 업체(A씨 업체)가 전직 전산공무원이 관여돼 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이는 소정의 검증만 거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대법원이 직접 입찰 심사를 보고 있음에도 기자들에게 뿌린 보도자료엔 “사법부 정보화사업은 2008년 이후 모두 조달청 발주를 통한 경쟁입찰절차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썼다.

▲경향신문 2018년 8월13일
▲경향신문 2018년 8월13일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 기사(위)와 10월2일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구매…‘의문투성이’ 대법 영상재판 사업" 기사
▲이범준 경향신문 기자. 사진=박소영 대학생기자
▲이범준 경향신문 기자. 사진=박소영 대학생기자

 

이 기자는 적어도 이 지점부턴 판사들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 비리의 주요 사실이 드러나면서 책임자급 법관들이 “충분히 잘못된 일이란 걸 인지한 정황이 있는데도” 허위 해명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기자는 “10년 동안 자기 아래의 전·현 공무원들이 7억 가량 뇌물을 주고 받았고 많게는 징역 10년 등 실형을 받았다”며 “관리책임에 있어 직무유기죄에 해당되며,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징계감”이라 말했다.

이 기자는 사법부를 향한 민주적 통제를 강조했다. 헌법은 법관의 독립을 보장할 뿐 ‘법원행정처’는 보호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법원행정처는 1987년 이후부터 2018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수사 전까지 한 번도 수사대상에 오른 적 없을 정도로 감시에서 제외됐다. 이 기자는 ‘사법평의회’를 거론했다. 유럽식 사법평의회는 대통령·국회·법원 등 3부에서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돼 인사·예산 등 사법행정 전반을 감독한다. 재판과 사법행정을 분리해 사법행정에 한해 민주적 기구의 통제를 받는 시스템이다.

이 기자 기사엔 과장 이하 공무원 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법관 실명만 적었다. 이 기자는 “공적 책임, 공적 결정권을 가진 공직자 이름이 일반 형사사범 이름보다 시민들에게 훨씬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역대 국장은 이정석, 최창영, 이영훈, 정재헌 판사이고, 심의관은 기우종, 이정환, 원호신, 고범석, 이태웅, 이은상, 임영철, 이상엽, 장정환, 유동균 판사다.” 이 기자가 지난 25일 칼럼에 공개한 법관 14명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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